치과 개원의로 살다보면 때론 아오이처럼 냉정한 모습이, 때로는 준세이와 같은 열정적 액션이 필요하다. 치과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시기 적절히 오가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냉정해야 할 상황에 뜨거운 열정을 보이면 피곤의 연속에 빠져들고, 열정을 다해야 할 때 냉정하게 바라만 본다면 빈곤의 나날을 보낸다. 지난 15년 동안 개원 생활에서 터득한 필자의 깨달음이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개원 초기 흥행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처럼” 냉정한 마음으로 영화도 보고 원작도 읽었다.
아오이와 준세이의 사랑에 많은 아픔과 시련이 있었지만 결국 극복하며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맺었던 것처럼 치과개원 생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영화 속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애절하고 감미로운 첼로 선율과 피렌체 이곳저곳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당장이라도 이탈리아행 항공기에 탑승하고 싶은 열정을 솟구치게 한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이 열정을 주로 이기는 편이라 바로 실행은 못한다. 하지만 버킷 리스트에 ‘피렌체 여행하기’를 추가함으로써 다소나마 위안을 삼는다.
영화에서 준세이는 오래된 회화를 복원하는 ‘고화복원사’다. 굉장히 생소하게 들리지만 고화복원사는 죽어가는 그림을 되살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게 하는 직업이다. 다시 말하면 상실된 치아 기능을 회복시키라는 명을 받은 치과의사의 일상과 고화복원은 예술적 관점에서 일맥상통하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디딘 많은 예술가들이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것 같다. 동네치과 원장에게 무슨 거창한 역사이고 예술 타령이냐고 할지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마음속에 생각하는 그대로 존재한다(잠언 23장 7절)’라는 말씀은 단지 사람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레토릭(Rhetoric)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는 피렌체 메디치가의 지원을 받으며 예술품들을 복원했던 경력이 있다. 노인 조각상을 제작중인 미켈란젤로에게 로렌초 메디치는 이런 말을 한다. “여보게! 미켈란젤로 노인의 치아는 보통 몇 개는 빠져 있다네.” 로렌초의 한 마디에 깨달음을 얻은 그는 영락없는 노인의 얼굴을 가진 조각상을 만들게 되었다. 로렌초의 진심어린 격려가 미켈란젤로의 열정을 이끌어 내었고, 그는 결국 르네상스 예술의 거장으로 성장하였다. 이 사례를 보면 치과든 집이든 간에 잘했을 때는 칭찬하고, 못했을 때는 꾸중이 아닌 격려를 하는 것이 꼰대가 되지 않는 지름길이다.
좀 더 냉정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의 인생을 들여다보자. 유년시절 양친의 사망으로 고아가 된 카라바조는 거리의 화가로 활동하며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추기경 델 몬테의 후원을 받으며 화가로서 찬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인생에 따뜻한 볕이 들자 카라바조는 방탕하며 안하무인의 삶을 살다 열병에 걸려 3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한다’는 동서양이 따로 없는 불변의 법칙인 듯하다.
사실적 묘사와 생동감 있는 화면을 특징으로 하는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 카라바조의 걸작 중 하나인 ‘Tooth Puller(1609년)’는 피렌체 피티 궁전(Palazzo Pitti) 내 팔라티나 미술관(Palatine Gallery)에 전시되어 있다. 구글링을 통해서라도 한 번 감상해보기를 추천한다. 마치 환자의 비명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고통스러운 환자의 모습이 애처롭다. 반면 치과의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굳게 다문 입술과 발치 겸자를 꽉 쥐고 있는 손을 보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보노라면 자꾸만 냉정 속에 열정을 숨기고 있었던 아오이가 오버랩된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접하게 된 후, 필자는 이탈리아에서 치과의사학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데 열정이 샘솟고 있는 중인데 그 일부분을 논단에 소개하였다. 그 나라, 그 지역의 역사를 알게 된 후 나중에 그곳에 여행을 가면 동네 골목길도 다르게 보인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진리다. 그래서인지 올 10월에 개봉하는 이탈리아 피렌체 골목 구석구석까지 구경시켜줄 영화 ‘인페르노’가 손꼽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