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치과의사라서 그런지 ‘몽니’란 단어를 들으면 왠지 치아 중의 하나처럼 느껴진다. 아픈 사랑니보다 조금 더 아픈 치아 같은 느낌이다.
몽니는 사전에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 부리는 성질’이라고 정의되어 있으며 순수한 우리말이고 준말은 ‘몽’이다. ‘몽니’라는 말에는 투정, 심술, 훼방, 트집, 욕심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몽니’는 ‘몽을 부리는 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강자의 용어가 아니고 약자의 용어이다. ‘갑질’이 강자의 용어라면 ‘몽니’는 약자의 용어라고 하겠다. 약자의 처지에서 강자에게 정면으로 대들 수는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화가 나서 강자가 하는 일에 슬쩍 초치는 행위가 몽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상대방이 그다지 잘못한 일도 없는데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심술을 부리는 등 괴롭히려 드는 사람들의 행동에 사용하기도 한다.
아침 출근길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뒤에서 시끄럽다. 젊은 여성은 빨리 내려가려는데 앞 노인이 가운데를 막고 서서 조금 먼저 지나가겠다고 하자 일부러 비켜주지 않아서 시끄러웠다. 결국 젊은 여성은 노인을 피하여 내려갔고 이에 노인은 자랑스러운 듯이 일부러 비켜주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다. 어이없는 생각에 돌아보니 70대 초반의 등산복 차림의 노인이었다. 더불어 자랑스러운 듯이 “한쪽으로 타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 심하다. 그래서 나는 중간에 탄다. 에스컬레이터 고장을 막고 다른 사람이 걸어다니는 것을 막아야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순간 생각나는 단어가 ‘몽니’였다. 에스컬레이터 회사가 잦은 고장에 대한 핑계로 사용한 말을 그대로 믿은 결과다. 더불어 치과의사회관 앞에서 농성을 벌렸던 ‘어버이연합’의 모습도 떠올랐다.
평소 같으면 모르는 사람과 좀처럼 잘 말을 섞지 않는 필자이지만 그날은 그런 이유인지 “손주 같은 젊은 친구가 회사나 수업에 늦을까봐서 빨리 가려는데 등산을 가시는 어른 분이 좀 비켜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에스컬레이터는 젊은 친구들이 벌어서 낸 세금으로 운행되는 것인데요. 그들이 빨리 가서 일하는 것이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날까봐 천천히 가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어르신께서 작은 공중도덕보다 바쁜 젊은 아이들에게 조그만 배려해주시면 어떨지요”하고 말을 던졌다. 더불어 주변 사람들의 눈치도 필자의 의견과 비슷한 듯하니 당신도 조금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별말씀이 없었다.
몽니와 따라 다니는 단어 중에 가장 흔한 것이 노인이다. 그럼 왜 몽니와 노인은 같이 붙어 다니는 단어가 되었을까. 이는 심리학적으로 매우 간단하다. 개인요인과 환경요인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이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쇠퇴하거나 오류가 생기면서 기존에 지니고 있던 심리적 프레임이 점점 강화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인은 심리적 프레임이 강화되어 점점 변하기 힘들어지는 반면에 환경은 급격히 변하여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연성의 결핍으로 환경을 이해하는 능력도 감소하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스스로 변하려는 노력을 멈추면 완고한 노인을 넘어서 고집불통의 노인이 된다. 이 정도 되면 사회는 물론 가까운 친인척이나 가족들도 회피하게 된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몽니도 있으나 사회적인 몽니도 있다. 우리사회의 전통적 유교사상인 노인공경을 이용한 사회단체의 몽니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어버이연합의 몽니이며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전경련 돈이 들어갔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이승만 정권의 이정재와 유지광이 떠올랐다. 더불어 그들의 똘마니 행동대원들의 지금 쯤 나이가 대략 70대 중후반 쯤 될 테니 과거의 경험을(?) 살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른이란 나이를 든다고 어른이 아니다.
단지 세월이 지나 늙었으면 그냥 노인일 뿐이다. 치과의사도 빼줄 수 없는 몽니를 스스로 제거했거나 제거하려 노력하는 이가 어른이다. 노인과 어른의 차이다. 노인은 증가하는데 어른이 점점 줄어드는 사회가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