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분야는 크게 학문적으로 심리학과 철학이 있고 종교적으로는 불교적 접근이 있다. 학문적 접근은 결과론에서 시작하는 것이 심리학이고 원인론으로 접근하면 철학이 된다. 여기서 ‘나(self)’를 그냥 인정하고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이면 학문이고 나의 존재에 이유를 달면 종교이다. 신이 있는 종교에서 ‘나’는 신의 피조물이고, 신이 없는 종교에서는 우주의 일원이다. 심리학에서 ‘나’는 생각하는 의식과 생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을 가진다. 학문적 무의식은 살아오는 동안에 경험한 추억으로 우리 기억 어딘가에 숨어있으며 작용을 한다. 이것으로 좀 더 확대하여 전생의 경험까지 포함시키면 종교이며 불교가 속한다. 이런 이론적 확대가 불교의 윤회사상이다.
사람의 생각은 한순간도 쉬지 않는다. 또 생각에 따라 마음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한다. 결국 마음의 반응은 생각이라는 원인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거나 판정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생각을 알면 마음의 작용을 알기가 조금 쉬워진다. 생각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외부의 자극에 따라서 반응하는 생각이다. 즉 눈으로 TV를 보거나, 귀로 음악을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밥을 먹는 등의 접촉에 의하여 생각이 발생한다. 이 경우에는 자극이 없으면 생각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외에 무위의 자극도 포함된다. 인간은 동물이라서 본능에 의하여 필요한 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라는 필연적 자극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배가 고파지는 굶주림이라는 심각한 자극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는 외부적인 자극 없이 스스로 나타나는 생각이다. 일명 ‘잡생각’이다. 과거 경험된 기억이 잡생각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잡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도와 같아서 단 한순간도 쉬지 않는다.
세 번째는 자신 스스로 만들어내는 생각이다. 이런 마음에 의지, 신념 등이 있다.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첫 번째 생각을 많이 따르는 사람을 욕심이나 욕망을 따르는 세속적인 사람이라 부르고 대부분 일반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 경향의 사람은 의지가 강한 사람, 실천력이 있는 사람, 심지가 곧은 사람이며 지속성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이루게 된다. 이들 중에는 성공한 사람이나 위인 등이 많다. 심리학은 첫 번째 생각과 그에 따른 마음의 반응을 관찰하는 학문이다. 불교는 세 번째 생각인 의지로 첫 번째 생각인 욕망, 욕심과 두 번째 생각인 잡념을 조절하겠다는 것이다. 일례로 의지력으로 생각을 잠재우는 것이 참선이다. 대부분 좋은 책들은 세 번째 생각인 의지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좋은 생각은 좋은 결과를 만든다’라든가 ‘생각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등등의 이야기들이 모두 세 번째 생각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세 종류의 생각이 한순간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이에 따라 마음은 끊임없이 그 생각을 판단(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 등등)하고 판정한다. 그리고 그 판정의 결과에 따라 스스로 반응을 한다. 좋으면 기쁨으로 나타나고, 싫으면 싫어하거나 화내거나 분노를 표출한다. 그저 그러면 졸리거나 하품이 나거나 지루하고 심심해진다. 생각에 따라 마음의 반응이 천차만별이다. 각자의 경험의 축적인 무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동일한 자극이라도 그 사람이 지닌 과거의 추억에 따라서 마음이 다르게 반응을 한다. 이렇게 다르게 반응하는 부분을 다루는 학문이 심리학이고, 이 부분에서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한 반응을 보일 때 그것의 원인을 찾아서 일반으로 돌려보려는 시도가 상담심리학이나 철학상담학이다. 그러나 상담을 통해서 안정을 얻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해서 약물을 통해 도움을 받는 경우라면 정신의학이 된다.
우리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생각을 한다. 그에 따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마음은 판정을 내리고 그 판정에 스스로 울고 웃고 슬퍼하고 고통을 받는다. 가끔 기쁨도 있지만 결국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일상에서 마음이 편해지려면 한 생각만 바꾸면 된다는 어느 선사의 말이 그윽한 커피 향에 어울리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