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요 <가시리>의 가사는 대중가요로도 불리여 잘 알려졌다. 그 <가시리>의 후렴구에 “위 증즐가 대평성대”가 나온다. 당신이 가셔서 태평성대가 온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항상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마음이 후렴구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태평성대의 사전적 의미는 ‘어진 임금이 잘 다스리어 태평한 세상이나 시대’이다. 그런데 이런 태평성대는 아이러니한 모순을 지닌다. 얼마 전 TV 사극 드라마에서 간신이 왕에게 간언을 드리는 말 속에 태평성대가 언급되었다. 간신은 “역사 속에서 태성성대는 충신과 간신이 적절하게 혼재할 때였습니다”라고 왕에게 간언하면서 자신과 같은 간신의 존재가 필요악임을 역설하였다.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는 ‘앞날을 걱정하는 건 태평성대에나 할 짓이다. 전시에는 그 날 안 죽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걸 모르면 그걸 아는 자의 짐이 되기 십상이다’는 말이 나온다.
대중은 태평성대를 원하고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는 태평성대에는 미래를 걱정하느라 편하지 않고 전시에는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는 모순성을 지녔다. 비행기를 타고 흔들릴 때 땅을 디디고 있을 때의 고마움을 알고, 군대에 들어갔을 때 사회의 자유가 그리워진다.
결국 태평성대는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중도이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가 모두에게 평화를 준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누구도 전부를 갖지 못함을 의미한다. 극단에 흐르는 것에 대한 경계이다. 나쁘다고 생각한 것이 사라지면 균형이 깨지면서 다른 한 쪽이 기승을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모택동이 참새가 곡식을 먹는 것을 금지하여 참새를 소탕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참새가 사라지자 반대로 벌레가 기승을 부려서 최악의 기근을 초래한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의학에서도 인체에서 기생충이 사라지면서 면역기능이 저하되어 아토피가 발생했다는 것과 유사한 이치이다.
사회나 인체에서나 자연계에서나 건강한 균형이 체제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간신의 역설을 넘어 정설이다. 아주 단순한 자연의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보지 못하고 항상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자기적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로 인하여 전체의 균형을 잃으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지난 한국 정치인들이 행한 실수를 요즘 사람들도 반복하고 있다. 한 달이 남지 않은 대선에 임하는 이들도 중도를 보지 못한다. 자신이 간신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충신일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구속된 예전 정치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행하였는지를 모른다. 자신들만의 태평성대란 꿈을 이루려 했기 때문임을 모른다.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악몽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치과의사가 크라운을 깎을 때 치질 삭제량이 많으면 이가 약해지고 삭제량이 적으면 포셀라인 파절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국 의료도 중도이다. 정치적으로도 적절한 균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는 의미이다. 옳다는 생각의 기준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국가는 적이 사라지면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것 또한 견제에 따른 자각이 사라지면서 타락으로 이르기 때문이다.
태평성대는 꿈이 아니다. 편안한 현실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항상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그 가치와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가장 평범한 것이 행복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멈춰야 보이는 것을 멈춰야만 안다. 심지어 멈추어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함의 행복을 안다면 굳이 멈추지 않아도 볼 수 있다. 오를 때 보지 못한 꽃을 내려올 때 보아서 소중한 것이 아니다. 꽃을 보든 못 보았든 매 순간이 소중하기에 비록 오를 때 꽃을 못 보았더라도 다른 무엇을 보았기에 모두 소중하다. 너와 나에서 우리로 변하면 그것이 태평성대이다. 오르고 내림을 그냥 등산이라 하면 비록 평범해지지만 모두 소중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