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치과신문에 투고를 시작한 지 700회를 맞이하니 감회가 새롭다. 2010년 6월 7일자 치과신문 400회 때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거의 15년이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필자에게 지면을 허락하고 글을 쓸 기회를 준 치과신문과 그동안 투고한 글을 감수한 기자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15년이란 시간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세계적으로는 2개의 전쟁을 보았고, 2번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보았다. 사회적으로는 대통령의 탄핵과 계엄도 겪었다. 수많은 사건·사고는 날이 갈수록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60대를 진입하였고, 글을 쓰다 보니 수필로 문단에 등단하여 수필가도 되었다.
코로나 이후로 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데 익숙해졌다. 어찌 보면 무미건조한 일상이다. 화초에 물을 주고 요리를 하는 소소함이 즐겁다. 사마천 사기나 시경 등 고전에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코로나로 시작한 미니멀 라이프가 이젠 정착되어 특별하게 필요한 것도 별로 없고 있는 것도 안 쓰면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물건뿐 아니라 생활도 간소화해서 주어지거나 요청받는 일이 아니면 스스로 사건을 잘 만들지 않는다.
가족이든 타인에게든 부탁하는 일을 줄이고 부탁받는 일이 있다면 가급적 들어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요리를 전담하고 설거지를 도와주면서 가사노동의 형평성이 균형을 이루었다. 생활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지구에 민폐를 끼치는 패러사이트 같은 느낌이 들어서 배출량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환경에 유해한 쓰레기를 배출하고 환경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변화는 단순히 코로나만의 영향은 아니고 나이나 삶의 내공이 쌓인 이유도 있다.
인간의 삶이 단풍나무의 나뭇잎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나면 부러운 것도, 간절한 것도 적어진다. 어떤 나무든지 위에 달린 나뭇잎과 아래 달린 잎이 모두 모여서 이루어진다. 나뭇잎이 위만 있거나 아래만 있으면 병든 나무다. 햇빛을 적게 받는 아래 나뭇잎이 풍요롭게 햇살을 받는 위의 나뭇잎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구성된 것이 자연계 모습이다. 인간계도 그렇게 구성된 것뿐이다. 위에 달려 햇빛을 많이 받는 나뭇잎처럼 부자가 있고 그늘진 아래 안쪽의 나뭇잎처럼 가난한 자가 있을 뿐이다.
어느 날인가 문득 삶이 나뭇잎과 다르지 않음을 보고 나면 많은 것을 원하지 않게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쟁이 끝나지 않는 것이나, 우수가 지난 지 일주일이 넘어서도 눈보라가 치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막장드라마를 보며 무거운 마음에 채널을 돌리는 것이나 저급한 정치인 모습이 버거워 뉴스 채널을 돌리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예전엔 비판했지만 이젠 변하지 않는 것들을 보면 그냥 채널을 돌린다. 이것이 회피인지 포기인지 지혜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이젠 더이상 그런 일에 마음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는 삶이 숨겨놓은 도토리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도토리를 열심히 숨기는 다람쥐와 별반 다르지 않다. 많이 갖고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갖고 싶은 것이 적을 때 행복해진다. 잘 잊어버리는 다람쥐가 잊지 못하는 인간보다 행복할 것이다. 잊지 못하는 인간 욕심은 아무리 채워도 끝이 없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누구나 주변에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부러움에 갇히면 행복해질 수 없다.
그냥 위에 달린 나뭇잎이라 생각하거나 다람쥐처럼 잊으면 간단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잊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행복해지지 못한다. 이런 생각은 일부러 그리하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고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냥 그것이 편해졌을 뿐이다. 코로나 덕(?)인지 모르지만 어느 날인가 어제와 오늘이 같고 별일 없이 무미건조한 하루하루가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700회 글을 쓰면서 항상 필자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