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있는 그림

2026.04.12 08:02:26 2026SS

글·사진_박송이(프랑스 공인 문화 해설사, 가이드랩 공동대표)

 

푸른 하늘 아래, 넓은 들판에서 고양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연날리기에 집중하고 있는 고양이들의 움직임에는 이 순간의 즐거움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러나 힘차게 비상하는 연과 에너지 넘치는 고양이들의 이미지와는 달리, 아이러니 하게도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고양이 화가’로도 불리는 영국 태생의 화가 루이스 웨인은 1860년, 런던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섬유 거래상이었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며 유일한 아들이었던 그는 스무살에 가장이 되어 어머니와 다섯 여동생을 책임져야 했다. 루이스는 태어날 때부터 구순구개열이었고 건강하지 못한 탓에 학교에 자주 나가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다행히도 교회용 직물을 디자인하던 어머니의 성향을 닮아 그림에 재능이 있었기에 웨스트 런던 예술학교에서 수학하고 그곳에서 보조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프리랜서 삽화가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다.

 

 

대단히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가족들과의 삶에 집중하던 루이스 웨인은 여동생들의 가정교사였던 10살 연상의 에밀리 리처드슨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였다. 아내가 유방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루이스와 에밀리는 비오는 날 집 앞에서 울고 있던 하얀털과 검은털이 섞인 고양이를 보게 되었고, 그 고양이를 구조해 함께 살기 시작했다. 길고양이 출신의 ‘피터’는 한없이 나약해졌던 에밀리의 삶에 큰 기쁨과 위로가 되어주었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그는 고양이를 그리며 자신의 새로운 작업을 개척해 나갔다.

 

 

‘내 경력과 예술의 시초는 피터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루이스 웨인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피터 그림 이후로, 그는 평범한 삽화에 그치지 않고 고양이들을 의인화하며 특유의 유쾌하고 재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고양이 화가’의 위대한 시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싶었던 마음에서 출발한 셈이다. 마침내 1885년 12월, 루이스 웨인은 ‘고양이들의 크리스마스 파티’ 라는 작품을 통해 하루 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150여마리의 고양이가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는 대작은 소개된 즉시부터 영국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고양이 ‘피터’와 남편의 재능이 꽃을 피우는 모습은 에밀리에게도 마지막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달인 1886년 1월, 에밀리는 끝내 병마와의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3년여의 투병 끝에 루이스의 곁을 떠났다. 아내를 잃고 심리상태가 불안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루이스 웨인의 사람처럼 옷을 입고 두 발로 서서 움직이는 동물 그림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고 그의 이름은 점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고양이들이 여름휴가를 떠나거나 티타임을 즐기는 모습 등은 유럽 전역에 고양이에 대한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루이스 웨인의 고양이 그림이 이토록 큰 인기를 끌기 전까지, 고양이는 유럽 문화에서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였던 것이 사실이다. 중세 유럽에서 고양이는 악마와 불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특히 흑사병이 창궐하던 당시에는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고양이를 학살하여 병을 키우는 비극이 이어졌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과학적인 인식이 발달한 후에야, 비로소 고양이는 혐오의 대상에서 작고 귀여운 동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17세기 귀족들의 부를 상징하는 ‘애완동물’ 시절을 거쳐 19세기에 비로소 루이스 웨인의 그림을 통해 오늘날의 친근한 캐릭터가 확립되었다.

 

이렇듯 고양이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인간에게 박해받기도, 사랑받기도 해왔다. 특히 서구권에서 고양이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전환된 데는 분명히 루이스 웨인의 그림이 큰 영향을 주었다.

 

 

루이스 웨인은 예술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갖췄지만, 그 외의 관리적인 측면이 너무도 부족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작가였지만 그림의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어, 출판사나 엽서 제작사에 저작권까지 모두 파는 방식의 계약을 이어갔다. 수백만 장의 엽서가 팔려나가고, 루이스는 나날이 유명해졌지만, 막상 그에게 정산되는 인세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어머니와 다섯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늘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막냇동생이 정신 질환을 앓으며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루이스는 매일 그림을 그리느라 바빴지만, 그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는 혼자서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1907년, 누적된 빚 때문에 채무 불이행 소송까지 당하게 된 그는 이러한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뉴욕으로 혼자 길을 떠났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고양이 화가’라는 별명으로 언론에도 자주 소개되며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유명 신문사에 만화를 연재하며 새로운 시작을 알린 그의 작업에 미국인들도 열광했다. 그러나 작업의 대중성과는 별개로, 뉴욕 사교계에서 그의 평판은 그리 좋지 못한 편이었다.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주 뉴욕과 미국 문화에 대해서 노골적인 비판을 숨기지 않았고, 일각에서는 오만한 영국 화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무렵, 루이스 웨인은 새로운 램프를 제작하는 사업을 제안받고 전 재산을 투자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하루에 수십 장씩 삽화를 그리며 벌었던 돈을 모두 잃고, 빈털터리가 된 그에게 설상가상 어머니의 사망 소식이 도착했다. 인생의 반전을 기대한 미국행이었으나 되려 가진 모든 것을 잃고 귀국하게 된 그의 삶은 심연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잇따른 여동생들의 사망, 질병 소식과 1차 세계대전으로 닥친 생활고는 그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기 시작한다. 1910년대 후반부터 루이스는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거나, 누이들이 돈을 훔쳐 간다는 등의 망상에 사로잡히며 급기야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1924년에는 가난과 조현병 증상으로 인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다는 스프링필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루이스 웨인의 소식에 영국 대중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귀엽고 재치 있는 고양이 그림으로 사람들의 삶에 기쁨을 주던 화가의 삶이 그토록 비참해졌다는 사실에 영국 총리와 예술가들이 그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도록 발 벗고 나서 모금 활동을 벌였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이 루이스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겨 그를 위한 기금 마련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1925년에는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베들렘 왕립 병원으로 옮겨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치료와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정신병원 시기의 작품에서는 마치 고양이에게서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표현했는데, 루이스는 말년에 실제로 고양이가 전기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믿었다. 이 파동은 고양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마치 만화경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보라색과 노란색, 주황색과 파란색 같은 강렬한 인상의 보색은 사이키델릭한 예술의 선구적인 형태를 선보인다. 한때는 루이스 웨인의 그림이 정신질환에 의해 점차 추상화되고 복잡해진다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이는 제대로 된 작품의 제작 연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벌어진 잘못된 분석이었다.

 

루이스 웨인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도 사실적인 고양이 그림과 ‘만화경 고양이’를 동시에 그렸다는 기록들이 확인된 것이다. 그림 스타일이 변한 것이 질병에 의한 퇴화가 아니라 기존의 틀을 깬 새로운 도전이었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특별한 화가였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루이스 웨인은 평생 고양이를 소재로 인간 삶의 다양한 일면들을 따뜻하고 익살스럽게 담아냈다.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고양이들은 둥근 눈 속에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가득 담고 있다. 현실의 벽 너머에서 그가 발견한 만화경 속 세상처럼, 우리가 마주한 새로운 해 역시 무한한 가능성의 패턴을 빛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가볍게, 하지만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나만의 걸음을 향해 힘찬 첫발을 내디뎌본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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