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초등학교에는 소풍이 없다. 1996년 교육개혁 때 소풍(逍風)을 학습의 연장선에 두어 현장체험학습이란 말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참 무지한 행위였다. 소풍(逍風)을 그저 놀고 구경이나 하는 놀이라 생각한 한심한 결정이었다.
소풍(逍風)에서 ‘소逍’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유래하여 세속에 걸리지 않은 자유를 의미하며, ‘풍風’은 신라시대 화랑도의 원류인 풍류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처음 학교에 소풍을 도입한 교육자들은 이런 것을 모두 감안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 위정자들이 단순한 생각에 소풍이란 단어를 현장체험학습이란 용어로 행정화시켰다.
용어는 내용을 바꾸는 힘이 있다. 소풍이 현장체험학습으로 바뀐 순간 즐거운 소풍은 일이 되고 짐이 되었다. 급기야 지금은 소풍이 사라졌다.
가장 큰 이유는 무능한 법원이다. 교육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2022년 강원도 속초에서 현장체험학습을 간 초등학생이 후진하는 차에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이 재판에서 담임교사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참 무능한 판결이다. 법원이 교육을 학살한 사건이다. 법적 잣대로 이대목동병원 소아전문의를 구속시킨 사건과 유사하다. 결국 소아전문의를 기피하고 많은 중증 소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와같이 교사 유죄판결로 인해 초등학교에서 현장체험학습을 기피하게 되었다.
얼마 전 한 간담회에서 대통령이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냐며 체험학습 부활을 지시했다. 간담회에서 초등교사 노조위원장의 발언은 한국 교육현장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예측 불가능한 사고와 법적 책임의 공포, 도를 넘는 과도한 학부모 민원, 행정 업무의 전가 등을 설명하고, “사진에 우리 애만 적게 나왔다”, “왜 멀리 가서 멀미하게 하느냐” 등의 민원을 막아줄 수 있느냐고 장관에게 반문하였다.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았다.
‘현장체험학습’이라는 말에는 ‘가서 반드시 무언가를 배워와야 한다’는 강박이 숨어 있다. 소풍이 교육의 연장선이 되는 순간에 교사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보고서에 무엇을 적을지 고민해야 한다. 학생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배움이 아니라 체험을 강조한 ‘소풍(逍風)’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소풍이 주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아이들은 발밑의 풀꽃이나 친구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 경쟁의 연장선일 뿐이다. 결국 무능한 행정이 ‘소풍’의 이름을 없애고, 무지한 법원이 알량한 법 지식으로 교육을 난도질한 탓에 ‘소풍’은 사망하였다.
간담회에서 한 교사는 아이들의 학창시절 추억을 위해서라도 현장체험학습이 중요하다는 말에 대해 학교는 추억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역시 교육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탁상공론이다. 초등교사 노조위원장은 교육 활동 중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사고에 대해 교사의 고의가 없다면 형사·민사 책임에 대한 면책, 교육 활동 범위를 벗어난 과도한 민원으로부터 교사를 보호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 교사의 자율권을 존중해 현장학습을 강제하지 말고, 교사가 스스로 갈 수 있는 안전한 환경부터 조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모두 맞는 말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러지 못해서 교육이 무너진 것이다.
자동차를 많이 팔기 위해서 자동차사고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교육자를 위한 특별법이 없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시절에는 특별법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200개의 사진을 찍은 선생님에게 아이 얼굴이 작게 나왔다고 민원을 넣는 시대다. 교사가 퇴근 후에 아이가 학교 교실에 스마트폰을 놓고 왔으니 학교에서 가져다 달라고 엄마가 전화하는 시대다. 이런 현실에서 누가 교사를 할 것인가. 교사 역시 소아전문의처럼 기피 직업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초등교육이 무너지면 올바른 상식과 인성이 만들어지지 못한다. 그런 사회는 결국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통제와 책임의 사슬로 묶인 체험학습은 교육을 병들게 하였다. 이제라도 장자의 자유를 담은 소풍(逍風)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육은 교육자에게 맡겨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