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스타벅스 사건이 사회적인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는 방향이 비상식적이다. 마치 좌우 진영의 이념적인 이슈인 것처럼 진행되고 있다.
이 사건의 문제점은 사회 구성원의 역사의식에 있고, 역사의식의 문제는 존립에 문제를 준다. 역사인식은 개인적인 다양성으로 접근할 수 없다. 공동체가 존립하기 위한 최소 단위가 역사인식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다양성이라는 이유로 이순신 장군을 비하하거나, 일제 강제 통치를 지지하는 생각을 지닌 자라면 이 땅에서 떠나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사회와 격리되어 비전향 장기수처럼 옥중투쟁을 하면 된다.
한 국가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세계가 주목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세대의 피와 땀 그리고 보이지 않는 희생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위상은 우연이나 자연 발생적인 결과가 아니다. 참혹한 전쟁을 겪고 전후 폐허에서 배고픔을 온몸으로 버텨낸 조부모 세대의 희생이 후진국을 건너는 기초를 깔았다. 그 위에 개인의 안락함을 기꺼이 포기하며 낮과 밤 없이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베이비부머 세대의 인내가 개발도상국을 넘는 기적을 만들었다. 이 두 세대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역사적으로 4·19의거의 기반이 된 1929년 광주학생의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저항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 장수에게 말한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에 근본을 둔다. 이는 좌우의 정치적 논리나 이념적 논리가 아니다. 비록 약자이지만 불의를 보고 죽음을 감수하고라도 의를 외쳤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경제적 발전이 가능했다. 고부군수의 수탈에 동학농민의거가 일어나 수많은 민초가 희생되었다. 나주역에서 일본 학생에게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머리가 당겨지면서 광주학생의거가 시작되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정선거가 4·19의거를 유발하였다. 전두환 군부 쿠데타가 광주민주화운동을 촉발하였다. 그리고 동학의거와 같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 역사적 일련의 사건들에는 생각의 다양성이 있을 수 없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의를 외쳤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스님들까지 전쟁에 참여한 것도 의를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스타벅스 사건이 위험한 것은 의와 불의의 개념이 무너진 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 세대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이 거대한 번영의 이면에 얼마나 위태로운 역사적 공백이 존재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소비문화의 갈등이나 특정 브랜드에 대한 시시비비가 아니다.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현세대의 역사의식 부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역사의식이 결여된 사회는 자신들이 누리는 번영의 뿌리를 알지 못하며, 뿌리를 잃은 번영은 결국엔 사상누각처럼 쉽게 무너진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좌우 진영 논리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 땅 위에서 수없이 의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던 수많은 민초들의 저항과 희생의 연장이었다. 수많은 외침과 끊임없는 내부의 폭력에 저항한 의를 위한 투쟁의 연장이었다. 종적으로 임진왜란 의병, 동학, 광주학생의거, 3·1운동, 4·19의거,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시간에 따라 이어지지만, 횡적으로 보면 모두 동일한 ‘의와 불의의 싸움’이다. 이번 스타벅스 사건이 유발된 것은 그런 역사인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불의를 의와 다름의 다양성으로 보지 않는 것이 윤리다. 유교적 가치다. 지금의 번영 속에는 임진왜란에 돌을 던진 이름 없는 민초, 동학 때 몽둥이로 일본군의 기관단총을 상대한 농민, 3·1운동 때 끝까지 저항한 유관순 열사, 4·19 때 경찰 총에 죽어간 학생, 5·18 때 군인의 총에 죽어간 시민의 희생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이런 역사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계승해야만, 더 이상 저항을 해야 할 일이나 사건이 유발되지 않는다.
정확한 역사의식이 청년 세대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 지금의 번영이 일시적인 신기루에 그치지 않고 대대손손 이어질 축복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