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아득하게 무서운 생각이 든다. 18년 동안 치과보존과 전문의로 살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신경치료를 했던가. 아마도 수만 개 치아의 구멍을 뚫고, 막혀 있는 근관 속을 탐색하고, 그 가느다란 공간에 선명한 주황색 가타퍼처를 촘촘하게 채워 넣었을 것이다.
0.5㎜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순간. 손끝 감각과 Root-zx에 의지해 막다른 골목을 헤매는 것 같은 그 수만 번의 순간들. 모든 치료를 마치고 마지막 엑스레이를 확인할 때면, 어쩐지 잘 키운 아들을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이제는 아프지 말고 잘 살아라’ 하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싶은 그런 마음이랄까.
사실 치료라는 게 늘 그렇다. 치과의사의 애정과 노력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아무리 내 손으로 완벽하게 끝냈다는 확신이 들어도 가끔은 탈이 나는 게 신경치료니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잊고 신의 영역까지 넘보려는 오만을 ‘휴브리스(Hubris)’라 불렀다. 어쩌면 최신 장비와 논문, 치료에 대한 확신 속에서 ‘내가 이 치아를 완벽하게 치료했다. 그러니 탈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는 순간이 치과의사의 ‘휴브리스’일지도 모른다. 특히 인간의 힘으로는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환자 고유의 특징, ‘호스트 팩터(Host Factor)’는 치과의사의 오만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가끔 정기검진을 위해 오랜만에 내원한 환자를 보다가, 분명 치료에는 잘못된 게 없는데 근관 너머 검게 변한 엑스레이를 마주할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놀라곤 한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탈이 난 걸까. 내가 놓친 게 있었던가. 현대 의학의 한계인 걸까. 아니면 그저 운명의 얄궂은 장난인 걸까.
이렇게 어쩌다 치료에서 실패할 때면, 나는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린다. 오이디푸스는 누구보다 총명했고, 용감했으며 두려움 없던 사람이었다. 즉 자신의 완벽함을 믿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진실을 쫓아 완벽을 추구할수록 도달한 곳은 결국 인간의 한계일 뿐이었다. 어쩌면 교과서대로, 논문대로 성실하게 수행한 진료 뒤에 찾아오는 실패 또한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치과의사인 나와 진료를 받은 환자 모두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결코 거대한 운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 영원히 사는 신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결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치과 체어 앞에서 늘 겸손해야 한다. 즉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다만 완벽을 추구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고, 치과의사로서의 시간이 쌓일수록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좋은 치과의사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예전에는 기술이 뛰어난 치과의사가 좋은 치과의사라고 생각했다. 더 정확하게 근관을 찾고, 더 빠르게 치료하고, 엑스레이상 더 완벽하게 충전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임상을 오래 할수록 생각은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어쩌면 좋은 치과의사란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이 완전히 통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치료를 포기하지는 않는 사람. 예상 밖의 결과 앞에서 오만 대신 겸손을 배우고, 무엇보다 실패 앞에서 변명보다 더 깊은 공부와 이해를 선택하는 사람.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은 치아를 치료하는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인간, 삶, 그리고 운명에 대한 겸손함이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이, 수만 번 반복했어도 결코 가벼워질 수 없는 신경치료를 끝낼 때마다, 속으로 작은 인사를 건네게 만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여기까지야. 그다음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니. 부디 오래 잘 버텨주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