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애송했던 서산대사(이양연)의 한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제34대 치협 회장단 선거가 끝난 직후, 직무정지 가처분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회무의 시계가 멈춰버린 치과계의 씁쓸한 현실 앞에서 이 경구를 다시금 무겁게 되새기게 된다. 치과계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지금 저 눈 덮인 들판 위에 과연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지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선거란 치과계에 산적한 현안을 해결할 새 일꾼을 뽑는 축제의 장이자, 3만 회원의 준엄한 민의를 확인하는 최고 권위의 민주적 과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소송전으로 이어져 치협을 혼란의 늪에 빠뜨렸던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현되고 있다.
시계를 잠시 지난 2020년, 제31대 협회장 선거 당시로 되돌려보자. 당시 한 후보 측은 선거 과정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법적 소송은 가지 않겠다”고 회원들 앞에서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선거가 종료되자마자 위법 행위 등을 운운하며 이의신청에 이어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등 무리한 법적 소송을 강행했다.
당시 치과계 내부에서는 이 ‘승복 약속 파기’에 대한 매서운 지적이 쏟아졌다. 지도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신의마저 저버렸다는 비판이었다.
다수 회원의 선택이라는 큰 민주주의적 결과를 존중하고 승복할 때 비로소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단 1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치열한 선거라 할지라도, 결과가 확정되면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상식이다. 선거 직후 이어지는 소모적인 소송전이 과연 치과계의 발전과 3만 회원을 위한 최선의 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이러한 과거의 전철이 34대 협회장 선거 직후인 오늘날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선인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으로 회무의 컨트롤타워를 마비시킨 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대의원총회에서 적법하게 인준받은 임명직 임원들에 대해서까지 추가로 가처분을 제기했다. 이는 비상 상황 속에서 최소한의 민생 현안이라도 챙겨야 할 실무진의 손발마저 완전히 묶어버리는 잔혹한 처사다. ‘협회가 철저히 마비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극단인 묻지마식 소송전은, 오직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관철을 위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개원가는 사상 최악의 보조인력 구인난, 초저수가 불법 덤핑치과의 난립, 그리고 생존권이 걸린 의료기사법 개정안 저지 등 단 하루도 지체할 수 없는 시급한 민생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새 집행부가 밤낮없이 발로 뛰어도 모자랄 이 엄중한 골든타임에, 끝없는 법적 다툼으로 치과계의 시계가 멈춰 선다면 그 막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진료실을 지키고 있는 3만 회원들의 몫이 될 뿐이다.
다시 ‘답설야중거’를 떠올려 본다. 지금 우리는 제34대 집행부 출범이라는 새하얀 눈 덮인 들판 앞에 서 있다. 누군가가 고집스레 남기고 있는 ‘협회 마비와 상습적 불복 소송’의 어지러운 발자국은 훗날 우리 후배들이 결코 따라가서는 안 될 치욕스러운 이정표로 남게 될 것이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 치과계의 미래를 위해 명분 없는 소송의 칼을 거두고, 정당한 선거 결과에 대승적으로 승복하는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우리 치과계의 역사가 오늘을 ‘끝없는 갈등과 분열의 늪’이 아닌, 위기를 딛고 일어선 ‘승복과 도약의 이정표’로 기록할 수 있도록, 부디 책임 있는 지도자다운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