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이자 의료인인 필자도 몸이 불편하여 인접한 다른 의원을 진료 마감 시간에 임박하여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접수를 받아 주어서 치료를 무사히 마쳤을 때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 병원의 직원들도 이런 경우에, 배려하는 얼굴로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잘 맞이하고 있을까?’
이와 같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을 베풀라”라는 메시지, 즉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덕률인 황금률(golden rule)이 그리스 신화를 투영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비롯한 문학 작품들과 동양 철학 속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손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생존이자 신앙이었다. 올림포스의 신들, 특히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종종 누더기를 걸친 거지나 지친 나그네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을 찾아가 사람들의 도덕성을 시험했다. 한 번은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나그네로 변신해 어느 마을을 찾았을 때, 부유한 주민 모두는 이들을 문전박대했고 오직 가난한 노부부 바우키스와 필레몬만이 자신들의 마지막 음식과 포도주를 꺼내 정성껏 대접했다. 신들은 마을 전체를 대홍수로 쓸어버려 벌하고, 이 노부부의 집만 신전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영원한 축복을 내렸다는 이야기는 대표적인 일화다.
“내가 오늘 대문 앞에 선 불쌍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언젠가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을 때 대접받기 위함이자, 저 나그네가 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경외심 때문이다”라는 관념이 곧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법칙으로 자리 잡으면서 신화적 정당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서사 전체는 “남을 박대한 자는 자신이 박대당하는 방식으로 응징받는다”는 황금률의 반대급부적 실현 과정을 보여준다. 오디세우스의 궁전을 침범한 무례한 구혼자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상반되는 모습과 함께,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에 돌아왔을 때 곧바로 왕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거지’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자기 집에 들어간 이유 자체가 바로 이 황금률을 바탕으로 한 시험이었다. 집안의 하인들과 구혼자들이 이 불쌍한 이방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 그들의 의로움과 죄악을 가려낸 것이다.
이와 같이 서양사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황금률이 동양의 유교에서도 강조되는 바, 공자는 ‘논어’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음성적 황금률(silver rule)을 제시했다. 사자성어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의 어원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맹자가 고대 중국의 성왕인 ‘우(禹) 임금’과 ‘후직(後稷)’, 그리고 공자의 으뜸 제자인 ‘안회(顔回)’의 삶을 비교하며 설명하는 대목에서 기원한다. 우 임금과 후직은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 온 나라를 누비며 국민들의 기근과 홍수를 해결하느라 자기 집 앞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고, 반면 안회는 누추한 시골 마을에서 단사표음(簞食瓢飮, 단촐한 밥과 물)으로 만족하며 학문에만 정진했다. 겉보기에는 두 부류의 삶이 완전히 달라 보이지만, 맹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와 후직, 안회는 모두 같은 길을 간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이 서로의 처지를 바꿨더라도 다 그렇게 했을 것이다(역지즉개연, 易地則皆然).” 즉, 성인들은 자신의 위치나 시대 상황이 달랐을 뿐, 상대방의 상황에 들어갔다면 똑같이 남을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라는 뜻에서 나온 개념이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인 것이다.
격동의 21세기를 사는 우리 치과의사들에게도 ‘오디세우스(Odysseus)’의 10년은 언제든 닥쳐올 수 있습니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Cyclops)’의 위협은 우리의 일터에도 늘 존재하기 때문에 개원의 항해에 중요한 돛대로서 ‘황금률’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동양의 역지사지(易地思之)와 서양의 황금률(golden rule)로 무장한 우리 개원의들이 ‘포세이돈의 풍랑’이 아닌 평온한 바다를 항해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