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그리는 그림 'Flower Still Life'

2023.11.13 10:16:41 VOL.177/2023가을겨울호

글 / 연지영 플로리스트

 

네덜란드를 생각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나요? 튤립과 풍차가 가장 먼저 생각나시나요? 그럼 네덜란드의 화가 하면 누가 먼저 떠오르나요? 비운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빛과 그림자의 대가 ‘야경’을 그린 렘브란트? 아니면 일상을 특별함으로 표현하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요하네스 베르메르? 모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들입니다.

 

그러나 플로리스트인 저에게는 꽃 정물화 그림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크 시대를 상징하는 네덜란드 화가들의 Flower still life(꽃 정물화) 그림이 전 유럽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아마도 여러분은 박물관이든 인터넷에서 우연히든 어디서든 스치듯이 이런 꽃 그림을 본적이 있을 겁니다. 보통은 ‘예쁜 꽃을 그린 그림이구나’ 라고 흔히들 생각하시겠지만, 이 그림들은 굉장히 많은 사회적 메세지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정물화(Still life) 탄생 배경
스페인과의 80년 전쟁에서 승리한 네덜란드는 가톨릭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16세기말 네덜란드가 동인도 무역으로 인한 신흥경제대국으로 떠오르면서 경제력을 갖춘 신흥 상인계층이 새롭게 등장했습니다. 새로운 꽃들이 네덜란드로 수입되었고, 이 무역에서 얻은 부와 권력으로 유럽의 황금시대를 이끌게 되면서,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주문할 만큼 부를 축적한 신흥 상인 세력이 등장하게 된거죠.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과 자본주의 부흥기의 개인주의를 공유했던 이들은 돈깨나 벌었다는 허영심과 기독교적 교훈을 적절히 융화시킨 그림을 선호했고, 여러 복선과 상징을 지닌 정물화는 그 욕망의 산물이었습니다.

 

 

 

 

 

 

 

 

 

 

 

 

 

1700년 이전의 초기 꽃 정물화
주로 종교적이며 짧은 인생과 삶의 허무함을 상징하는 꽃을 주 재료로 그린 ‘플라워 스틸 라이프’는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했습니다.

 

초창기의 꽃 정물화는 모든 꽃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일종의 꽃 책자 같은 모습입니다. 같은 꽃이 두 개 이상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서로 계절이 다른 꽃들이 함께 있다는 것은 실제 꽃 작품을 그린게 아닌, 계절별 꽃을 그 시기마다 그려 상상속에 합쳐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을 완성하는 데 적어도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가장 위에 보이는 프리틸라리아 임페리얼(Fritillaria imperialis)은 왕을 상징하는 꽃입니다. 그래서 항상 가장 위에 위치해 있어요.

 

▲왼쪽의 하얀 백합(Lilium)은 성모마리아의 순결과 자비를 상징합니다. 만약 그림에 여인이 백합을 들고 있다면 성모 마리아입니다. 그림에 따라 성모 마리아를 왕보다 위에 그리는 경우도 있고 아래에 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해바라기는 신(하나님)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리틸라리아(왕)와 해바라기(신)를 그림에 동시에 등장시켜 두 존재의 대비되는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오렌지 톤의 색상 사용 : 네덜란드 귀족 가문에게 헌정된 그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백합이 등장합니다. 백합 왼쪽으로 나비도 보이시나요? 나비는 죄와 부활을 상징합니다. 허물을 벗는 변태의 과정을 거치면서 죄를 범한 인간 영혼의 구원을 상징하죠.

 

▲이 튤립이 보이시나요? 최초의 주식 폭락이라고 불리며 소위 지금의 ‘영끌 투자’의 시초라 할 수 있습니다. 튤립 광기를 불러 일으킨 샘페르 아우구스투스 튤립. 17세기 이 튤립 구근 한 개의 가격이 땅 3만 7,000m2 즉 9에이커의 가격 또는 소 69마리 가격과 같았다고 하니 투기의 광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튤립은 허영과 헛됨을 상징합니다.

 

▲산딸기는 천국의 열매를 상징하고 그 옆에 시들어버린 식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산딸기 위에 달팽이가 보이시나요? 달팽이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죽음을 기억하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결국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과 부패가 닥칠 것임을 의미합니다.

 

후기 꽃 정물화
후기 시대의 꽃 정물화는 꽃을 좀 더 자연스럽게 그렸지만 그림의 의미는 인생의 허무함을 담은 경우가 많습니다. 위에서 보았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이 그림의 의미는 결국 짧은 생의 덧없음과 허무를 나타냅니다. 인간의 생은 짧고(잘린 꽃) 돈과 허영(튤립)은 찰나이니 죽음을 기억하라.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궁극의 무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종교적이고, 영적인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참 재미있죠? 아름다운 꽃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인생의 허무를 담는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합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했던가요?

 

몇 백 년이 지난 지금 플로리스트들에게 이 꽃 정물화 그림을 재해석해서 만드는 작품이 유행입니다. 저에게도 늘 이 꽃 정물화 그림들은 영감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상징적인 의미는 퇴색했지만 꽃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우니까요. 그림의 꽃도 아름답지만 생화가 주는 생동감을 여러분도 느끼셨으면 좋겠네요.

 

글 / 연지영 플로리스트
2004 네덜란드 국립원예학교(MBO Wellant Aalsmeer) 플로리스트 졸업
2006 네덜란드 국립 원예학교(MBO Holland De lier) 마스터 졸업
2004~ 현) 솔로 전시전, 국제 무대장식 등으로 네덜란드에서 활동 중
2007~ 현) 네덜란드 플로리스트 국가 자격증
(A)Dutch Flower Arranger diploma 한국 담당 Co-Ordinator
플로리스트 유럽컵, 독일 IPM , 고양시 국제 꽃 박람회 등 다수 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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