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의 아름다운 치과의사

2018.09.07 17:41:55 2018 FW

오동찬 치과의사(국립소록도병원)



감사함을 알게 하는 제2의 가족 
고흥반도의 서남쪽 끝 녹동항 앞바다, 이 앞에 면적 4.42km²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 소록도가 있다. 섬의 모양이 작은 사슴과 닮아 소록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는 이 아름다운 섬이 갇힌 장소의 대표가 된 것은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을 소록도에 모아 격리하기 시작하면서다. 예쁜 이름과는 달리 한센병 환자의 애환이 깃든 사연 많은 섬, 이곳은 이제 더 이상 편견의 장소가 아닌 아름답고 행복한 섬이다. 

소록도에서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국립소록도병원 내 4개 병동에, 그 외 분들은 7개 마을에 거주하고 계신다. 그 마을 중 하나인 구북리에 살고 계시는 정 모 아저씨가 진료하러 오셨다. “어이 오 부장! 오늘 날씨도 꿀꿀한데 오전 진료 끝나면 짬뽕이나 먹으러 가세~~” 난 주저 없이 “네! 그러면 조금만 기다리세요. 11시까지 진료하고 식사하시러 가시죠” 대답을 하고 열심히 오전 진료를 한다. 8시 30분부터 진료가 시작되고 주민들은 보통 10시 30분부터 점심을 드신다. 오전 진료를 서둘러 마치고 정 모 아저씨와 다른 마을에 사시는 홍 모 아저씨 이렇게 셋은 내 차를 이용해 금산 쪽으로 짬뽕을 먹으러 출발한다. 지금은 녹동 육지와 소록도 사이에 다리가 놓여진데다가(2009년-소록대 교), 소록도와 거금도로 불리는 금산까지도 다리가 이어져 있다. 정 모 아저씨께서 금산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짬뽕을 먹고 싶다고 하셔서 그곳으로 향한다. 물론 식사비는 정 모 아저씨께서 내기로 하시고... 김영란법 때문에 걱정은 되지만(?) 과거에는 내가 밥값을 다 내었으니 이제 살림이 넉넉해진 우리 주민들이 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난 우리 주민들이 사주는 것을 잘 먹는다. 그리고 나에게 식사를 사주신 분들도 마을로 돌아가시면 “오늘 오 부장하고 같이 밥 먹었어”라고 자랑도 하신다. 


 

소록도를 나와 거금대교를 운전하면서 난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기뻤다. 뭐 점심 한 끼 먹는데 이렇게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하다는 말을 하냐고 의문을 갖는 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난 이게 감사하고 기쁘다. 우리 주민들과 이렇게 자유롭게 중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을 수 있어서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우리 식구들과 식사를 위해 섬 밖으로 나가면 소록도에서 왔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대한민국 사람인데 식당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미용실, 심지어 병원에서조차도... 

우리 주민들은 과거에 한센병에 감염되었지만 지금은 다 치유되었다. 한센병 치료약이 1950년에 들어와 1980년대 전 지역으로 투약되면서 80년대 후반부터 한센병 신환자가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기존 질환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다 완쾌판정을 받아 WHO(세계보건기구)에서도 대한민국은 한센병 치료국으로 인정한 상태다. 왜 다른 질환들은 차별과 편견이 별로 없는데 우리 한센인들은 이러한 차별과 편견이 치료가 다 된 지금까지도 따라다니는지 모르겠다. 


한센병은 장구한 역사를 가진 만성 전염성 면역질환으로 그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인류 문명과 때를 같이하여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구, 외적 증상 및 한센병에 대한 편견과 그릇된 인식으로 인해 천형의 질환으로 소위 문등병으로 불리어왔고, 불치의 유전병으로 오인됨으로써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한센병은 저항력이 없거나 약한 체질, 즉, 감수성 체질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균이 침입하여 감염되는 질환으로 약 3~7년의 잠복기를 거쳐 임상적으로 발병하게 되며, 나균이 1차적으로 말초신경을 침범하고, 2차적으로 피부와 때로는 기타 조직 특히 눈, 상기도점막, 근육, 골 및 고환 등을 침범하는 질환이지만 한센병을 일으키는 나균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양되지 않고 있다. 아울러 결핵과 마찬가지로 법정 3군 전염병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생후 2~3개월 안에 결핵예방접종제인 BCG를 맞게 되면 예방학적, 보건학적으로 잘 발달된 나라에서는 한센병 예방이 약 99%정도일 만큼 선진국에서는 사라지는 병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한민국은 이제 한센병 신환자가 없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마찬 가지로 소록도에 계시는 어르신들도 이제 완치상태이고 다만, 조기치료가 늦어져 장애만 있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다양한 채널을 통해 소록도에 대한 편견이 걷히면서 요즘은 식당에 가면 잘 대해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급적 일반적 식사시간 보다 이른 11시 정도에 점심을 먹으러 간다. 이렇게 점심식사를 약속하면 12시까지는 진료를 못하지만, 양해를 구하고 11시에 간다.다른 주민들도 대부분 이해해주신다. 본인들도 나랑 같이 밖에서 식사를 하시기 때문이다. 

어느새 소록도는 제 2의 고향이 되어 버렸다. 24년이란 세월이 나를 이 분들과 한 식구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1994년 4월 23일, 군의관 훈련을 마치고 첫 부임지가 이 곳 소록도. 같이이 곳에 온 일곱분의 의과 전문의들 마음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소록도가 첫 부임지인 것이 정말 기뻤다. 드디어 그 분과(?)의 약속이 조금씩 이루어진 것에 대한 감사함이랄까? 첫 번째 환자분을 대했을 때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감이 밀려왔 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센병 후유증으로 손가락이 불편하고 안면기형으로 아랫입술이 처져 있었으며, 교합도 잘 맞지 않아 술자가 지금까지 치료해왔던 분들과 다르고 상태도 좋지 않았다. 없는 실력이지만 한 분 한 분 진료도 하고 얼굴과 입안에 농양(abscess)이 있는 분들은 I&D 시행하고, 입안에 낭종(cyst)을 가지고 계신 분은 낭종 적출술을 시행하였으며, 입과 얼굴에 구강암이 있는 환자들은 수술도 했다. 소록도에서 치료가 어려운 분들은 인근 대학병 원에 의뢰를 하였지만 거절도 당했다. 아랫입술이 처져 있어 식사도 곤란하고, 침도 흘리던 분들이 하순 재건술을 통해 얼굴도 예뻐지시고(?) 식사 때 밥과 침을 흘릴 일이 줄어들어 식사 시간도 줄여주었다. 특히 윤 모 할아버지 같은 경우 아래턱에 구강암이 발생하여 매일 5~7번씩 병동에 올라가 치료를 해주면서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지내다 보니 한 해 한 해가 가버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진료를 받으신 분들이나 마을에서 만난 분들은 대개 “고생하시겠네요!” 라는 말이 전부였다. 난 최선을 다해 진료하고 진정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는데 단지 “고생하시겠네요”라니? 이 말이 난 듣기 싫었다. 왜 다른 말도 많은데 꼭 이런 말만 하실까 궁금해 물어 보았더니 정주면 1년 후에 떠나버려 상처만 남기 때문에 그렇단다. 진료와 수술이 끝나면 매일 스쿠터(50cc 미만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을 감찰(?)하러 다녔다. 또한 본인이 손이 제일 좋았으므로(?) 가가호호 방문하여 이분들이 어려워하시는 파리 퇴치에 혁혁한 공도 세웠다. 처음에는 경계의 눈빛으로 맞이하셨지만 조금씩 그 경계를 풀어주셨다. 어느 날인가 남생리 정 모 할아버지와 조 모 할머니께서 방안의 짐을 옮겨 달라고 하시기에 옮겨드린 후 그분들께서 고생하셨다고 맛있는 밥상을 내놓으셨다. 사실 밥통은 쪼끔(?) 오래되었으며 그 속에 들어 있는 밥은 노랗다 못해.... 반찬은 김치와 된장, 밭에서 막 따온 고추, 그리고 초대하지 않는 손님 파리(그 당시 이곳에는 가축들을 많이 키워 파리들이 정말 많았음, 아시는 분들은 다 알거라 생각됨), 정말 먹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때 ‘나오는 것이 더럽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배를 거쳐 아래로 다 나온다’ 는 말씀이 생각나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새마을 황 모 아저씨께서 진료실에 오셔 “어~ 오 선상! 어제 남생리에서 밥 먹었다매? 오늘 우리 집에도 와서 할멈이랑 같이 먹새” 이렇게 해서 이 마을, 저 마을 식사 초대와 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팥죽으로 저녁 걱정을 덜게 되었고, 이후로는 “수고하시겠네요!” 라는 말대신 “어! 오 선상 왔어? 고생이 많지~” 라는 정겨운 말로 바뀌었다. 물론 지금도 언제든지 식사 초대를 받으면 즐겁게 간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종종 삼겹살 파티도 열어 초대를 하신다. 손들이 불편하셔서 나에게 고기 굽기를 시키기 위해서(?) 초대하신 게 아닐까 생각도 해 보지만 정말 맛있다. 우린 이렇게 산다. 가정적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불러서 한 시간 이상 하소연도 하시고.... 

난 이게 정말 고맙다. 내가 뭔데, 그러나 이 분 들을 위해 딱히 해 드릴 것이 없다. 다만 들어 주고, 기도만 할 뿐이다. 이럴 땐 정말 마음이 아프다. 인간사 다 똑같은데 왜 우리 소록도 가족들에게 이러한 고통이 찾아올까? 가끔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래도 이분들은 오직 천국을 바라보면서 사시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씀들 하신다. 이런 분들을 보고 지내는 나도 행복하다. 진료 중간 중간에 커피 마시자며 말씀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오늘은 녹동에 나가 회 사온다고 저녁에 같이 먹자는 장 모 아저씨. 퇴근 시간 후에 병동에 계신 두 명의 애인들(박 모, 유 모 아주머니)과의 커피타임, 병원일이 힘들 때 찾아가면 언제나 아들 대하듯이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마을 어르신들. 또한 진료실과 마을 순회할 때 고구마, 감자, 양파, 상추 심으셔서 잘 되었다고 먹어보라고 주시는 우리의 식구들.... 비록 김영란법 때문에 약간은 고민되지만 그래도 자식에게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에 잘 받는다(처벌받지는 않겠지요?). 

이런 게 행복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가끔 싸움도 하면서 지낸다. 싸움을 하고 하루가 지나 면 또 다시 웃으면서 지내는 난 어느 순간 소록도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우리 소록도 가 족들이 있어 행복하고, 또한, 항상 나와 가족들을 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해주시는 분들이 있어 감사하다. 

가끔 딸들이 “아빠는 소록도 어르신들과 사는 것이 행복하실지 몰라도, 이젠 우리에게도 신경을 좀 써주세요”라고 투정도 부린다. 가만 생각해보면 난 내가 좋아서 이곳에서 살고 시간나면 해외 한센인 마을과 빈민촌에 가 진료하고 오지만,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요즘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든다. 내가 철이 들어가나? 


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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