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국 문화유산 지킴이 치과의사 함석태

2025.05.06 14:02:47 2025SS

글·사진_권훈 원장(미래아동치과)

함석태 선생에게는 ‘최초‘라는 단어가 자주 붙여진다. 이러한 최초라는 표현이 기록으로 증명이 되면 더욱 의미가 깊다. 최초에는 언제나 선구자적인 모습이 있다. 선각자적인 행동도 있다. 그래서 최초는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준 존재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우리나라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를 더 말하라면 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을 들 수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근대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수장가로 꼽을 수 있는 인물로 오세창, 박영철, 김찬영, 함석태, 장택상, 이병직, 이한복, 박창훈, 박병래, 손재형, 전형필 등이 있다. 치과의사 함석태는 개인적인 애호의 목적으로 문화유산을 수집하였다. 또한 고미술품뿐만 아니라 한국 도기와 민속 공예품을 남다른 전문가적 식견과 애정을 갖고 구입하였다.

 

함석태는 문화유산 애호가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일본인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는 문화유산 수호자 역할까지 수행한 셈이다.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우리의 문화유산까지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전형필이 우리나라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사재를 털어 문화유산 지킴이를 자처한 덕분에 지금 우리가 접하는 문화유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지키는 독립운동도 무장 독립투쟁 못지않게 중요했다. 함석태는 자신의 직업과 직업으로 인한 경제적 여유를 통해서 독립운동가를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독립운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 지킴이를 자처한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다만 전형필만큼 여유롭지는 못해서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문화유산을 수장하였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1944년 소개령에 의해 수장품을 싣고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갔다가 북한 공산 정권 수립 이후 수장품을 가지고 월남하던 중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체포되어 북한 당국에 미술품을 전량 압수당한 것으로 보인다.

 

함석태의 손자 함각의 회고 중에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이 있다. “지금 광화문 교보문고 옆에 있는 비각의 절체문도 사실은 할아버님이 보관하고 계시던 것이다. 일제 때 철(鐵)이 남아나지 않을 무렵 할아버지가 애써 구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함각이 회고한 광화문 비각의 철제문에 관한 이야기는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근대기를 대표하는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1904-?)은 1942년 춘추 8월호에 ‘도변야화’에서 삼각정 토선 함석태 댁 철문짝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한 서울 안에 제짝기리 있으면서 떨어진지 삼십여 년을 그저 만나지 못하는 슬픈 짝들이 있다. 삼각정 토선 댁 철문짝과 본정 삼정목 어느 부호집에 서 있는 만세문들이다. 원래 광화문 네거리 동북부에 있는 비각의 정명 울타리요 문이었다. 길을 널히느라고 뜯어 경매할제 토선(함석태의 호)께서 그 문짝의 공예성의 우수함을 보고 철공소로 가 부서질 것을 구해 내인 것이었다. 그때는 하숙 시대라 문만도 파출소 뒤에다 여러 달을 두었다 하니 그 거창한 울타리며 석물들까지야 샀어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울타리와 석물은 어느 철공소로 갔었는데 그 철공소에 별장 문을 맞추러 왔던 진고개 부호가 그 울타리에 흥미를 가진 것이다. 돈이면 으레 될 줄 믿고 토선께 문짝까지 교섭이 왔으나 벽처에 있는 개인의 별장을 꾸미려는 것이라 그 물건에 대한 심경이 양편이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여러 번 거액으로 탐내 왔으나 토선은 굳게 문짝을 보관해 온 것이요. 저쪽도 별장에는 단념하고 진고개 저의 집 울타리로 써 버린 것이다.”

 

 

광화문 비각의 공식 명칭은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다. 1칭경기념비는 1903년 세워졌는데, 광화문 길을 넓히느라 기념비와 기념비전을 제외한 울타리와 문이 철거되었다. 기념비가 세워진지 10년이 안되어 비각 철문짝은 경매에 넘어가 철공소에 팔려 갈 운명이었는데 함석태가 극적으로 구해내 자신의 집 문에 부착한 것으로 보인다. 다행스럽게 이태준이 그토록 안타까워했던 비각의 철문짝과 만세문은 광복 후 서로 만나게 되어 현재의 자리에 복원되어 있다. 2함석태의 안목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낸 것이다. 그래서 함석태에게 우리 문화유산 지킴이라는 호칭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함석태는 고종칭경기념비 철문짝에 남다른 집착을 가졌을까? 정말 그 문짝의 공예성의 우수성 때문에 그랬을까? 필자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칭경기념비는 고종이 즉위한지 40년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고, 기념비 글씨는 고종의 아들인 순종이 직접 썼다. 기념비를 보호하는 건물에는 조선시대 건물의 품격을 표현하는 단어중에서(전,당,합,각,재,헌,루,정) 최고의 명칭인 전(殿)을 붙여 기념비전(記念碑殿)이라고 한다.

 

고종칭경기념비와 그것을 보호하는 기념비전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두 명의 숨결이 담겨있다. 그래서일까? 나라를 잃은 조선 사람들의 첫 번째 저항으로 손꼽히는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시위에 참여한 수많은 민중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고종 칭경기념비전에 모여든 모습이 외국 선교사 사진으로 전해지고 있다. 3칭경기념비를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함석태가 지켜낸 기념비전 철문짝은 단순한 공예품이 아니다. 함석태는 애국 애족의 정신으로 우리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의 일부를 보존한 것이다.

 

의사이자 문화재 수집가인 박병래(1903-1974)는 자신의 저서 ‘도자여적’ 글중에 하나인 ‘금강산 연적’에서 함석태가 감탄할 정도로 골동에 애착을 가졌으며, 그는 골동에 정혼(精魂)을 기울였다며 함석태를 골동 전문가로 극찬하였다. 또한 함석태가 특히 작은 물건을 좋아해서 바늘통이며 담배물부리 같은 것을 잔뜩 사모았다고 하였다.

 

함석태의 골동 수집의 규모가 엿보이는 회고다. 박병래의 글 중에 한 문장이 필자의 이목을 집중하게 하였다. “함씨가 중학동의 십자각 대문짝을 샀던 일도 잘 알려진 일이다”. 애석하게도 십자각 대문짝에 관한 부연 설명이 전혀 없다. 십자각의 대문짝은 철제가 아닌 목공예품으로 추정된다.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나라의 권위를 상징한다. 광화문에서 좌우로 시작하는 경복궁 담장의 좌, 우측에 십자각이 있었다. 좌측은 서십자각, 우측은 동십자각이다. 두 개의 십자각 건물은 경복궁의 망루이다. 궁궐의 궁은 임금의 거처이고, 궐은 출입문 좌우에 설치된 망루(望樓)다. 망루는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높이 지은 다락집인데 경복궁 내외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건축물이다. 즉 궁 밖의 상황을 감시하기 위해 보초를 서는 곳이다. 경복궁의 전체 모습을 보면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얼마나 중요한 건축물인지 알 수 있다. 지금은 동십자각은 도로에 섬처럼 서 있고, 5서십자각은 그 터에 표지석만 있다 .6따라서 함석태가 구입한 십자각 대문짝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망루인 서십자각인 것 같다.

 

 

함석태는 1923년 전차 부설공사로 철거되는 서십자각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서십자각의 대문짝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십자각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너무 어이가 없다. 광화문 앞이 마지막 정거장이었는데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안에서 치루는 큰 행사 즉 ‘조선부업품공진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이때 행사장 출구를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으로 잡았다. 행사 때 사람들이 영추문으로 많이 나오게 될 것이 예상되어 총독부는 광화문 앞까지만 오던 전차를 영추문까지 연장 설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십자각을 완전히 헐어버린 것이다.7 광화문에서 출발한 전차가 서십자각에서 오른쪽으로 틀면서 전차 길을 놓아야 했는데 서십자각 앞의 길이 좁고 굽이가 심해 십자각과 경복궁의 담장을 헐어 버린 것이다.

 

함석태는 고작 큰 행사 하나를 치루기 위한 방편으로 궁궐의 망루와 담장을 헐어버리는 조선총독부의 만행을 목도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그는 서십자각 대문짝이라도 자신의 삼각동 집에서 보관해오다 일제 소개령 때 함석태가 평안북도 영변으로 잠시 피신할 때 가지고 간 트럭 3대에 실려서 북한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 함석태 소장품은 모두 서울로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현존하는 동십자각은 있어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축물이다. 왜냐하면 도로 한 가운데 섬처럼 홀로 서 있기에 멀리서 바라만 봐야하는 문화유산이다. 오랜 기간동안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되었지만 지금도 동십자각의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다. 마치 원래부터 이렇게 도로 한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동십자각이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된 이유도 서십자각이 허물어진 이유와 비슷하다.

 

1929년에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었다. 그 당시 신문 기사에 의하면 조선총독부는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동십자각에 연결되어 있던 담장을 헐었다.8 이유는 박람회 입장자를 위해 동심자각만 남기고 경복궁 담을 헐어내고 이 자리에 새 길을 낸 것이다. 이때부터 동십자각은 길 한가운데에 놓이게 된 것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우리나라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광화문 좌우에 있는 서십자각과 동십자각은 광화문과 한 세트다. 3개의 건축물에는 대한민국의 혼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함석태는 서십자각 문짝에 남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과의사 함석태를 포함한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유산을 지켰던 여러분들 덕분에 현재 대한민국은 문화보국(文化保國)이다. 즉 문화를 통해 우리나라를 지킨다. 2025년에는 대한민국 치과계에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일제강점기 한국 문화유산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했던 치과의사 함석태의 위대함이 더욱 부각되기를 소망한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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