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사라진다면

2025.11.01 08:07:38 제1135호

진료실에서 바라본 심리학이야기 (732)

10월 중순이 지나면 설악산 단풍이 절정이라는 기사가 나와야 하건만, 11월이 되는데도 단풍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여름이 지나고도 이상고온이 지속된 탓이다. 아직도 모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80년대에는 여름이 100일, 겨울이 110일, 봄이 80일, 가을이 75일이었다. 2020년에는 여름이 130일, 겨울이 140일, 봄이 50일, 가을이 45일이었다. 2026년을 앞둔 지금 가을이 거의 사라진 느낌이다.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치과 외래에서 반팔 가운에 에어컨을 사용하였다. 오늘 아침은 영하는 아니지만 5도다. 강원도 지역은 영하다. 이 정도면 가을이라기보다는 초겨울이라고 해도 될듯하다.

 

올해는 가을이 사라진 모양새다. 높고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하고 가을이 지나갔다. 삼한사온이란 단어가 사라졌듯이 앞으로 높푸른 가을 하늘이란 단어가 사라질 날이 올듯하다. 이제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당연한 듯이 나오던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가 아니다.

 

지구 북반구 중간쯤인 37도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했다. 이는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었다. 적도부근에 위치해 여름만 있는 나라는 혹한 겨울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반면 사계절이 뚜렷하면 봄·여름에 준비하여 가을에 식량을 비축하지 않으면 겨울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도를 지닌 나라는 대체로 비슷한 경험을 가졌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중국이고, 유럽은 스페인 마드리드와 튀르키예 이스탄불이고, 북미는 미국 뉴욕과 시카고다. 반면 영국은 우리보다 위도가 10도 정도 높아서 위도 50도에 위치한다. 대부분 북유럽과 중부 유럽이 속한다. 그러나 위도가 높다고 겨울이 반드시 추운 것만은 아니다.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에 따라 차이가 난다. 해양성 지역보다 대륙성 지역이 혹독하게 겨울이 춥다. 

 

결국 추운 지역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실용적이어야 생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특성들이 각 나라와 민족 풍습이 되었다. 그렇게 기후는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고, 생각과 감정에도 깊숙이 관여되었다.

 

가을은 풍요와 수확의 계절이다. 가을이 풍요로워야 따뜻하고 편안한 겨울을 지낼 수 있다. 만약 흉년으로 준비가 미흡했다면 힘든 겨울과 그보다 더 어려운 봄을 견뎌야 했다. 춘궁기(春窮期)다. 조선 영조시절, 왕비 간택에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인지 묻는 시험에서 김씨 처녀가 “궁핍한 백성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보릿고개”라고 답했다는 유래를 지닌 보릿고개는 얼마나 힘든 시기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유럽에서 마녀사냥이란 비정상적인 행태도 춘궁기에 분노한 농민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책임을 전가하는 수단이었다. 이렇게 계절은 인간 생존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문화생활과도 밀접했다.

 

이상기온으로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고 그만큼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있다. 머지않아 사계절 중에 가장 짧은 가을이 봄보다 먼저 사라질 날이 올 것 같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단된 지금 가을이 사라진다고 생활이 크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인간의 감성은 조금 다를 듯하다. 천고마비의 높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단풍을 과거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슬프다. 추수를 끝낸 넉넉하고 여유로운 농부의 마음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각박한 도시생활이 이미 우리 감성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운동회 소리가 시끄러워서 민원을 넣고, 아파트 앞집에서 문을 여는 인기척이 있으면 마주치지 않게 조금 늦게 나와 주는 것이 매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도 가을이 짧아진 탓이라고 생각해본다. 과거 유럽에서 흉년은 마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듯이 요즘 인성이 무너지고 상식이 깨지는 일들이 증가되는 것을 가을이 짧아진 탓이라고 핑계를 찾아본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경험해보지 못하였으니 타인과 나누어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가까운 가족과도 나누어 쓰지 못한다.
 

마음의 여유를 조금이라도 넓힐 수 있다면 본인에게도, 주변인에게도 평안할 것이다. 높고 넓은 가을하늘이 마음에 여유를 주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남은 올 가을을 잠시라도 잡으려 하늘을 본다.

 

김영희 기자 news001@sd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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