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2003)’에는 아무리 봐도 제정신 같지 않은 언행으로 ‘이게 내 정신이야!’를 보여주는 코믹팝스타 빌리 맥(Bill Nighy扮)이 등장한다. 1949년생인 이 영국 노배우의 연기는 참으로 독특하고 매력 있어, 필자는 이 배우가 등장하는 영화를 빠짐없이 보게 된다. 유명한 일본 영화의 리메이크작이자, 그가 주인공인 ‘윌리엄스’로 나온 요즘 영화가 있다는 영화광 친구의 말에 솔깃하여 얼마 전 작품을 감상했다.
시청공무원 윌리엄스는 그의 업무와 관련된 일들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 귀결(歸結)을 대략 다 안다. 민원 해결의 현실적 한계는 물론, 런던시민들의 간절한 민원과 관련 부조리들이 무관심과 방관으로 무시되고, 방치되고, 잊히는 것에 거의 초월한 경지에 이른 ‘노련한’ 공무원이다. 그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민원을 들고 몰려온 여인들을 자기가 맡고 있는 부서에 첫 출근한 초짜공무원 웨이클링에게 응대를 맡기고, 선임공무원 미들턴을 보조하라는 근엄한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민원이 시청의 공원과에서 시작하여 환경미화과를 거쳐 공공사업과까지 한참을 돌고 돌아 다시 자기부서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민원서류가 자기에게 돌아오면 별로 짜증스럽거나 귀찮다는 기색 없이 다른 부서에서 잘못하고 있는 거지만 “그냥 여기 책상에 두죠, 뭐 별로 해될 것 없으니…”라고 뭉갠다.
영화 ‘어떤 인생, Living(2022)’은 일본의 전설적 영화감독인 아키라 구로사와의 영화 ‘이키루生きる(1952)’를 올리버 허머너스(Oliver Hermanus)감독이 70여년 만에 리메이크하여 빌 나이(Bill Nighy)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시킨 작품이다. 원작 ‘이키루’에 비하여 심오한 철학적 깊이와 리메이크작에 요구되는 재해석이 부족하다는 평단의 비판도 있지만, 필자는 빌 나이의 연기가 너무도 리얼하며 완벽했다고 느꼈고, 특히 면허번호가 네 자리인 치의들에게는 그 시대정서가 공감되는 작품이라는 생각에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윌리엄스는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 전직동료 마거릿(에이미 루 우드扮)의 위로와 웨이클링(알렉스 샤프扮)의 사람들을 위한 헌신과 노력에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끝내 그는 내면의 변화로 삶의 자세를 바꾸고, 민원으로 접수되었지만 모두가 서로 미루고 덮어두었던 놀이터 만드는 일을 시작하여, 이 프로젝트에 남은 시간을 모두 쏟아붓게 되고, 그의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선한 영향을 받아 그의 죽음 후에 변화해간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 작품의 원작 ‘이키루’ 역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는데,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많은 핑계로 미루던 지역공동체의 하수구처리장 문제와 놀이터건설 숙제를 직접 나서 해결한다는 줄거리를 가진다. 모든 공동체에게는 주어지는 과제가 있다. 어느 부서의 일이고 누가 나서야할 지 애매모호한 경우도 많지만, 그것이 분명한 경우에서조차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미루는 경우들을 심심찮게 본다. 그러다 보면 문제 해결의 시기를 놓치고, 해결 가능의 선을 넘는 것도 경험해왔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 원작 ‘이키루’에서는 ‘어떤 인생’에서 보다 좀 더 깊고 섬세하게 다룬다. 주인공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또 그가 자기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인지하는가에 대한 내용인데,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 사회가 여러 부분에서 소위 ‘사회병리의 암진단 공론화’에 대해 의도적으로 조심스럽고 소극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러다 보니 개인보다 공동체의 경우는 공동체 전체가 ‘종양적’ 상황을 인지하게 되는 게 상당히 늦어지게 되는데, 이는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모두 숨 가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이 시대, 우리가 알고도 그냥 방치하는 장애물이나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며 고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뭐 별로 해될 것 없으니...” 라며 미루는 것에 대해 개인도, 공동체도 과연 그렇게 큰소리 안 나게 뭉갤 일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