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단] 一讀二飮酒三好色

2013.11.04 15:34:14 제565호

이시혁 논설위원

가을 깊어가는 저녁의 한학 모임에서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 여덟 글자가 갑자기 설악 단풍 같은 화두로 성큼 다가왔다. 독서라면 그리 뒤지지 않고 음주 역시 빠지지 않는다 해도 호색(好色)이라는 것은 끼리끼리 나누는 음담 정도로 넘어갈 일인데 물론 그 서열이 마지막이라는 안위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를 굳이 제 삼(三)으로까지 써서 불러들일 일인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글귀를 끝에서부터 풀어낸다면 호색으로 하나 되는 것은 남녀가 서로의 몸을 섞는 일인데 이것은 일체감이라는 기쁨 중의 가장 하위 단계라는 것이다. 또한, 음주는 술이 들어와 내 몸의 체액과 섞이며 하나 되어 육체 코기토(cogito)의 싱싱한 쾌락을 가져오지만, 독서를 통해 얻는 고귀한 하나됨 즉 보이지 않는 지식의 순수 각성이 우리 존재에 파고들어 남기는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일체감과 희열과는 비할 바 없다는 말인 셈이다.

 

그나마 입시와 상관없이 순수한 책 읽기를 했던 세대들에게는 책이 귀했던 탓에 독서가 취미도 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정형화된 이성(理性)이 지배하는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독서의 틀은 ‘베스트셀러’라는 괴물을 만들어 돈벌이에 앞장세운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난무하는 집단의식은 마녀사냥 같은 허구의 함정을 곳곳에 만들어 사람들을 가두고 세뇌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글은 목적이 되지 못하고 무한한 수단으로 통용되는 현실이다. 그리고 독서와 배움의 결과를 마치 여행사 가이드처럼 줄줄이 풀어내는 메모리 칩 같은 두뇌를 지닌 사람들의 소음을 들을 때면 차라리 음주와 호색이 더 나을 수 있겠다는 자탄(自嘆)을 하게 된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 세잔이 그린 32장의 상트빅투아르산은 어릴 적 그가 뛰놀고 자란 곳이었다. 그는 그 산을 그리며 철저히 자신이 경험한 이성의 관념을 벗고자 했다. 인상주의 모네 역시 여러 장의 루앙 성당을 그리고 그렸지만, 그는 관념이 가져오는 빛의 명멸에 집중했다. 그러나 세잔은 어린아이처럼 낯설게 온몸으로 본질이 느껴지기까지 주객일체에 몰입했기에 오늘날 그는 미술사의 변곡점에 서 있는 것이다. 또한 죽기까지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가장 비싼 그림을 남기고 간 고흐 역시 그가 그린 것은 자연이 우는 소리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섬뜩한 순수의 감동을 독서와 회화에서 느끼고 찾는 일은 실로 쉽지 않은 걸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원초적 지각에 집중하기도 한다. 1977년 첫 대학가요제 대상곡 ‘나 어떡해’를 듣거나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흥얼거릴 때 느끼는 우리의 심원으로부터 솟는 살이 떨리는 소리 말이다. 그럼에도 독서를 하며 느끼는 경지는 이미 삼매(三昧)에 있는 것이기에 그 어떤 즐거움도 흔들 수 없다는 확신이다.

 

우리는 삶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線)들을 이성의 관념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실상 눈앞의 테이블 밑에는 검은 손뿐 아니라 흰 손마저 보이지 않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생각은 묶여있고 간혹 상상의 금기가 가져오는 의식의 번뇌를 즐길 여유조차 없다. 그래서 기나긴 인생의 호기심을 독서의 여행에서 찾기 시작한다면 좌뇌와 우뇌는 서로 상충하겠지만 그때 느끼는 실존의 중압감은 대단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 첫 장(章)을 도(道)가 정의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말로 시작한다. 부언하면 도라는 것은 유와 무의 상대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이원론적 상하 관계처럼 보이는 선과 악 역시 실제로는 선을 드러내는 것이 악이고 악을 키우는 것도 선이 될 수 있다는 수평적 관계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개인으로 게다가 개원의로 지내는 삶은 독거(獨居)와 시간을 넘어서는 기다림의 연속일 것이다. 예전처럼 환자가 넘쳐나던 시절에는 힘들었던 독서의 제일 경지를 탐해 볼 기회일 수도 있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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