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단] 아임(牙任) 권훈

2016.06.08 20:39:38 제684호

권 훈 논설위원

치과의사 David Burbank(1821-1895)는 고사성어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미국 LA 인근 도시의 지명 Burbank가 David Burbank의 이름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Burbank가 취미삼아 목장을 운영하기 위해 구입한 1,000만평을 상회하는 대지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06년 시로 결정되었다. 현재 버뱅크에는 영화 회사 월트디즈니 프로덕션과 방위 산업체 록히드마틴 등이 위치하고 있다. 치과의사 Burbank 그 이름 길이길이 기억되리.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별호:別號)이 필자에게 생겼다. ‘아임(어금니 牙, 맡길 任)’이다. 호(號)에는 사람의 가치관과 취향 등이 반영되어 만들어진다. 다소 부끄럽지만 ‘아임(牙任)’의 탄생 이야기를 소개해본다. ‘어금니 아’는 필자의 강력한 의지로 선택되었고, ‘맡길 임’은 친한 형님이 추천해 주셨다. ‘나에게 맡겨진 치아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고 영어 친화적인 호(號)라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어 주셨다. 치과의사에게 이보다 더 좋은 호가 있을까 싶다.  전남 장성에 개원 중이신 아곡(妸谷) 김재성 형님 고맙습니다.


1981년 필자가 중1때 영어 교과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I am Tom. I am a student.’ 35년이 흐른 지금은 ‘I'm 권훈, I am a dentist’라는 낙서를 하며 상념에 잠겨있다. ‘나는 가수다’라는 방송이 떠오르면서 무대에 올랐던 가수들의 열정, 노력과 눈물이 머릿속에 오버랩 된다. 앞으로 어떤 치과의사가 되고 싶은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에 관한 목표 설정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꼭 필요하다. 어떤 자리나 위치보다는 OOO 치과의사로 기억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빈칸에 들어갈 낱말은 각자의 몫에 달려있다.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1889-?). 3만 명에 육박한 대한민국 치과의사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몇 명쯤 될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필자의 예상이 틀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5년 치과신문(土禪 함석태와 澗松 전형필, 제621호) 논단을 참조 바란다. 함석태는 도자기 골동품에 심취되어 ‘토선(土禪)’이라는 호를 가졌다. 도자기를 닦고 부비며 애상하던 그의 모습은 마치 도공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치과 피겨린(figurine)을 수집중인 필자는 토선 함석태의 일화를 읽으면서 진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일제강점기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에는 여성운동가로, 한국전쟁 이후부터는 전쟁  미망인을 위한 사회사업가로 일생을 바친 여자 치과의사 매지(梅智) 최금봉(1896-1983)은 진흙 속에 묻힌 진주 같은 존재이다. 최금봉은 1929년 동양여자치과의전 전공과를 졸업하였고 1938년 안동, 1951년 부산, 1967년 서울에 치과적인 발자취를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치과적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 치과계가 해야 할 숙제라 생각된다. 매서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매화처럼 엄혹한 시절에도 꿋꿋이 국민들에게 지혜를 나눠주신 매지 최금봉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소암(素巖) 기창덕(1924-2000)은 의사들이 외면하던 의사학(醫史學) 자료를 정리하는 데 평생을 바쳐 의사학계에서는 국보급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넉넉한 수입과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의사학 뿐만 아니라 치과의사학 자료를 수집하는데 금전적, 시간적 열정을 쏟았다. 그는 자신의 호 소암(素巖)이 ‘돌대가리’란 뜻이라며 겸손한 농담을 하셨지만 임종 직전까지 돌부처처럼 앉아 우직하게 의료문화역사에 관해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저절로 생겨난다.


토선(土禪) 함석태, 매지(梅智) 최금봉, 소암(素巖) 기창덕 세 분의 삶을 추적하면서 필자의 치과의사 인생 네비게이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필자의 호 아임(牙任)은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이지만 아임(牙任)이 입력해준 경로를 잘 따라가서 내 인생의 목적지까지 잘 안착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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