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을 알현하다 ②

2017.01.31 10:10:36 제716호

손창인 원장의 사람사는 이야기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경주 월성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바꿔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됐다고 한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만7,000근, 금 3만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삼존불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자 신라에서는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었다. 5m가 넘는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년)에 금당을 짓게 됐고, 선덕여왕 12년(643년)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율사의 권유로 외적을 막기 위한 바람에서 80m 높이의 9층 목탑을 조성, 645년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93년에 걸쳐 완성한 국가사업이었다.


황룡사에는 천사옥대를 제외하고 황룡사 9층 목탑과 장육존상 등 신라삼보(三寶)가 있었으며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 그 당시의 유물인 182㎝의 대형치미는 이 건물이 얼마나 웅장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황룡사는 1238년 고려 고종 25년 몽고침입으로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심초석과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그 넓은 황량한 벌판에 수십 개의 초석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어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10여㎞를 달려 우리 여행의 주목적지인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도중, 선덕여왕릉 부근의 신문왕릉과 야산에 쓸쓸히 자리 잡은 효공왕릉을 살피고 선덕여왕릉으로 향했다.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으로 신라 27대 왕이다. 이름은 덕만으로 진평왕의 맏딸이다. 진평왕이 왕자를 얻지 못하고 승하하자 화백회의의 추대로 31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등극 후 16년 동안 647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여왕 통치 당시는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신라는 어려움을 격고 있을 때였다.


642년 고구려, 백제 침략으로 서쪽 변경 40개 성을 빼앗기고, 서해로 나가는 한강거점인 당항성과 낙동강 거점인 대야성까지 침략 당하자 선덕여왕은 김유신 장군을 발탁해 지금 경산지역인 압량주 군주로 임명했다. 이후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고,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구원 외교를 시행했다. 당시 당태종은 선덕여왕이 독신여왕이라고 비하하며 수모를 줬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선덕여왕은 세금 감면과 민생구휼 등 선정을 베풀어 모든 백성이 칭송하며 춤을 추었다.


분황사, 첨성대, 황룡사9층 목탑을 세워 나라의 안녕과 불교문화를 융성케 했다. 선덕여왕은 신통한 예지력까지 갖춰 자신이 죽는 날과 죽어 묻힐 장소까지 예언했다. 또 예지력으로 여근곡에 숨은 백제군을 찾아내어 섬멸케 한 것과 당태종이 선물로 보낸 모란꽃 그림을 보고 나비가 없음을 알고 꽃씨가 싹이 터져 꽃이 피면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꽃이 피자 향기가 없었고, 당태종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생각, 향기 나는 황제의 사찰인 분황사를 지어 자신은 향기가 있는 여왕이란 것을 선포했다. 여왕은 그녀가 예언한대로 647년 1월, 비담과 염종의 난이 평정 되던 날 눈을 감았다.


아침 9시, 우리는 여왕이 잠든 낭산으로 달렸다. 선덕여왕릉 가는 입구에 문무왕이 완성한 사천왕사지가 우리를 맞는다. 지금은 사지터만 있고 조성공사가 진행되는 것 같다. 사천왕사터를 돌아 올라가는 좁은 산길,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이다. 얼마나 갔을까, 초라하고 작은 이정표가 선덕여왕 가는 길이라고 표시돼 있었다. 아침안개가 자욱한 낭산 여왕릉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안개 속에 무수히 나타나는 이상한 모습의 그림자들, 아, 이것이 무엇인가?


모두가 흔들리는 안개 속에서 미친 듯한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왕릉으로 오르는 산 전체에 하나도 빠짐없이 흐느적거리고, 구불거리며, 자빠지고 엎어지듯이 이리 휘고 저리 휘돌며 춤을 추는 소나무, 안강소나무였다.


1400년 전 백성을 사랑한 여왕의 치세에 한마음으로 여왕을 맞이하며 모두가 미친 듯 춤추었던 백성들의 춤사위가 이러했던가? 죽어 땅에 묻힌 여왕을 향한 존경의 마음인가? 그렇게 산속 모든 소나무는 춤을 추고 있었다. 50m도 채 못 올라가 경사가 가파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전거에서 내려, 조성된 나무계단을 따라 올랐다. 드디어 소나무 숲 사이로 하늘이 열리며 여왕의 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게 웬일인가, 신라 여느 왕릉과는 판이하게 다른 작은 규모하며, 소박한 모습의 릉은 평소 여왕의 소탈하고 우아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기단석은 크기가 다른 돌로 1~2층으로 적당히 둘러쳐있고, 초라한 상석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보통 왕릉 주위 소나무는 쭉쭉 뻗은 금강송이나 적송이고, 초석, 기단석에는 신상이 조각되고 돌난간이 둘러쳐져 있어야한다. 특히 김유신 장군의 묘와는 그 화려함에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공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후 수많은 전쟁과 반란 등을 겪으며 순탄치 않은 삶을 살다간 여왕의 릉은 그렇게 때 묻지 않고 순수한 향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여왕의 음덕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듯, 지금의 혼란한 우리나라에도 여왕의 덕이 미쳐, 국태민안하게 해주시길 머리 숙여 참배하며 기원했다. 우리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불국사로 향했다.


신라의 대표적 건축물인 불국사는 751년 경덕왕 10년 재상이던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로,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대웅전 등의 경내 조형물들은 신라의 뛰어난 조형미를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석가탑은 이번 지진으로 손상을 입은 듯 지지대를 설치해 놓았다. 우리는 자전거를 다시 밴에 싣고, 불국사 터널과 추령터널을 지나, 덕동호 부근에서 자전거 라이딩을 시작했다. 경사 10%~12%의 추령재 길은 있는 힘을 모두 소진케 하는 난코스 중의 난코스였다. 토함산 능선을 넘어가는 이 고개는, 예전에는 동해 감포 가는 유일한 고갯길이었다.


우리는 추령터널 직전 3거리에서 옛길인 왕의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500m의 오르막을 오르니 백년찻집이 있었다. 우리는 이 찻집에서 백년차를 맛보며 오르막 라이딩의 피로를 풀었다. 잠시 후 우리는 백년찻집을 떠나 내리막 20㎞를 달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무왕 수중릉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감은사지에 들렸다.


감은사 석탑 역시 경주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듯 지지대가 설치돼 있었다. 우리는 감은사지를 떠나 문무왕이 잠든 대왕암으로 향했다. 해변 가까이 위치한 바다위에 드러난 바위! 그곳이 대왕암이라 하였다. 파도치는 대왕바위에는 갈매기만 날아드는데, 대왕의 호국의 뜻이 우리나라에도 비쳐주길, 고개 숙여 기원했다. 파도치는 해변에는 귀를 에는 듯한 찬바람만 불고 있었다. 2016년 12월18일. 오후 1시 40㎞의 경주 라이딩을 끝내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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