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와 풀기

2011.12.26 14:29:00 제475호

진료실에서 바라본 심리학이야기 (74)

12월의 절반을 넘어서 이제 올해도 열흘 남짓 남았다. 대부분의 모임에서 망년회(忘年會)로 하루하루가 바쁜 때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송년회라는 말보다는 망년회라는 말이 더욱 많이 들린다. 망년회는 국어사전에 ‘연말에 한 해를 보내며 그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자는 뜻으로 베푸는 모임’이며, 송년회는 ‘연말에 한 해를 보내며 베푸는 모임’이란 뜻이다.

 

그런데 망년회는 忘年會(ぼうねんかい)라고 하여 일본에서 들어온 문화이다. 일본에서는 신년회와 망년회를 한다. 신년회는 4월 초에 시작하며 그때가 벚꽃이 만발할 때이다. 그래서 벚꽃구경 한다는 명분아래 신년회를 한다. 아주 일본적인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때를 시작으로 한해의 모든 일정이 시작된다. 그것이 우리에겐 ‘벚꽃놀이’로 알려져 있는 ‘お花見’인데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잔재적인 요소로 여의도에서 벚꽃축제가 열릴 때마다 필자의 마음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그리고 연말에는 망년회를 한다. 다 잊자는 것이다. 직장에서 억울한 일이나 힘들었던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새 출발하자는 의미이다. 이 역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주 일본적인 내용이다. 일하는 동안에는 꾹 참고 일을 하고 연말에는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섭섭함이 있었다면 그것이 어찌 하루 만에 잊어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아도 정신건강에 너무 좋지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조금 다르다. 얼마 전 필자가 현재 배우고 있는 ‘살풀이’의 대가인 인간문화재 정재만 교수님과의 대화에서, 교수님은 우리 민족의 정서는 ‘푼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살을 풀면 ‘살풀이’고, 한을 풀면 ‘한풀이’고, 화를 풀면 ‘화풀이’라고 하시며,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맺힌 것을 풀어야 하는 정서를 가진 민족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어떻게든 만나서 풀어야 끝나는 것이란 말씀을 하셨다. 더불어 같이 나누는 것이 베푸는 것으로 그 또한 ‘푸는’ 것이라 하였다. 결국 남의 것을 풀어주는 것이 ‘살풀이’고, 내 것을 푸는 것이 ‘한풀이’고, 남을 위해 푸는 것이 ‘베푸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전통적인 연말의 정서는 엉키고 맺힌 것들을 잊어버리는 망년회가 아니라 그것을 지혜롭게 풀어가면서 한해를 베풀고 보내는 송년회(送年會)인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본의 잔재와 더불어 너무도 힘든 현실을 풀려고 또 노력해야 하느니 풀기보다는 그냥 덮어버리는 망년회로 바뀌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무엇이든 ‘풀기’에는 역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어려운 수학문제를 ‘푼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사람과 사람의 일 또한 수학문제를 풀듯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요즘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새벽 7시에 ‘살풀이’춤을 배우고 있다. 탈춤을 배우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 정재만 교수님의 ‘춤과 전통의 깊이를 맛보려면 살풀이를 먼저 배워야한다’는 조언에 살풀이로 바뀐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 골프도 끊었던 필자이지만 요즘은 상큼한 새벽 공기와 차가운 연습실의 마루바닥을 버선신으로 느끼는 감이 좋아 일찍 연습실로 향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같이 움직인다. 어떠한 잡념도 없다. 그러기에 좋다. 살풀이는 하늘에 대한 공경으로 시작하여, 땅에 대한 감사로 이어져, 인간의 삶을 매끄럽게 풀어주는 춤이다. 즉, 천지인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기에 춤에 깊이가 있고 품격이 있고 멋이 있고 맛이 있다.

 

손끝 하나의 움직임도, 버선발 한끝의 움직임도 감동을 주며, 여리디 여린 살풀이 비단수건이건만 무겁기가 한이 없을 때도 있고 가볍기가 잠자리 날개 같기도 하다. 우리의 것은 너무도 흔한 듯하며 튀거나 잘난 척을 스스로 하지 않기에 스치고 지나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한없는 깊이가 있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그것들이 사라져가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울 때가 많다. 신묘년 끝자락에 올해가 다하기 전에 아직 풀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기자
본 기사의 저작권은 치과신문에 있으니, 무단복제 혹은 도용을 금합니다

주소 :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나루로 257(송정동) 치과의사회관 2층 / 등록번호 : 서울아53061 / 등록(발행)일자 : 2020년 5월 20일 발행인 : 강현구 / 편집인 : 최성호 / 발행처 : 서울특별시치과의사회 / 대표번호 : 02-498-9142 /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