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함께 하는 여행기 '슈투트가르트에서 베로나까지'

2022.11.17 15:03:32 2022SS

글/그림_김현(치과의사)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것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지금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보고 싶은 얼굴들을 만나는 것,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 것, 여럿이 모여 좋아하는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는 것 등등. 끝없이 셀 수 있을 것 같은 많은 아쉬운 것 중에서도 가장 간절한 것은 아마도 여행일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낯선 도시의 역사와 사람들, 그들의 음식과 문화예술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신선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또 이런 생생한 경험은 우리가 그 순간 살아있음을 깨우쳐 주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새 이런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 채 2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설문조사에서 코로나19가 종식되면 가장 하고 싶은 것 1위가 ‘여행’로 꼽혔다.

 

많은 이들과 같은 마음으로 여행을 그리워하며 사진첩을 펼쳐보다가 문득 그 순간 그 장소에서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미풍과 따사로운 햇살, 광장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노천카페에서 풍기는 달콤한 커피 향과 음악 소리… 이런 기억들을 캔버스에 옮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코로나 직전인 2019년 봄과 여름에 다녀왔던 2차례의 유럽여행을 그림에 담았다. 모든 것이 정체된 힘든 시기에, 감상하는 이들이 여행자가 되어 각자의 행복했던 여행의 추억을 떠올렸으면 하는 취지로 두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첫 번째 여행은 2019년 6월 중순에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를 네 커플이 네 대의 자동차로 드라이빙하는 투어였다. 맨 처음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전통 독일식당의 시원한 Paulaner 맥주 한잔과 슈니첼로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기원하며 9일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저녁식사 후 산책을 하며 둘러보니, 뢰머광장 주변으로 레고블럭을 닮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반대편으로는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해 질 무렵의 주황빛 벽돌 건물이 따스한 빛을 뿜어냈다. 강가의 거위들도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참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다음 날 일찍 복잡하기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기차를 타고 슈투트가르트로 이동했다. 슈투트가르트는 인구 6,000만 정도로 독일에서 6번째 큰 도시인데, 발레리나 강수진이 오랫동안 활동했던 곳이라 그런지 왠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이곳은 대표적인 대학도시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세계적인 명차들의 전시관과 박물관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자동차박물관에 도착해 본사 직원의 가이드 투어를 함께했다. 거대한 공간에 전시된 마차처럼 생긴 초창기 차에서부터 미래형 콘셉트카까지 탐나는 많은 차들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박물관 안의 예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마친 후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 여행의 발이 되어줄 네 종류의 차를 렌트해 스위스 국경까지 약 3시간 정도 아우토반을 달렸다. 독일의 고속도로는 길이 아주 탄탄하고 매끄러워서 운전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췄고, 운전자들이 양보도 잘 해줘서 가끔 고속주행도 가능했다. 국경을 지날 때는 차에 탄 채로 조그만 초소 같은 곳에서 간단한 신분증 확인만 하고 통과했다. 집들의 모양이 조금 바뀌었을 뿐 독일과 거의 비슷한 스위스의 산골마을을 지나 오후 5시쯤 드디어 취리히에 도착했다.

 

나에게 ‘취리히’는 여고시절 읽었던 시 한 구절로 기억되는 도시다. 고트 프리드 벤의 “당신은 취리히는 뭐 별난 도시인 줄 아십니까? 언제나 경이로움과 성스러움으로 가득찬?”이라고 한 구절에서 취리히는 아득히 먼 미지의 도시였고, 가슴 설레고 신비로운 장소로 느껴졌다. 물론 반대의미이겠지만 항상 경이로움과 성스러움으로 가득할 거란 상상을 했었던 바로 그 취리히에 드디어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주변 도로를 걸어 과일을 파는 식료품 가게에 가서 특이한 모양의 과일들을 몇 가지 사왔다. 나는 여행을 가면 꼭 그 지역의 식료품 가게에서 과일을 사서 맛본다. 이국적인 모양의 과일은 맛도 향도 조금씩 우리 것과 달라서 항상 여행의 즐거움을 실감나게 한다. 다르다는 것이 주는 신선함일 것이다. 기찻길이 여러 개 보이는 야외 카페에 나와서 해 질 무렵의 커피 한잔과 음악을 즐겨본다. 저녁 바람이 상당한 기세로 불었고 시차 때문에 피곤함이 몰려와서인지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날 만날 취리히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했다.

 

드디어 해가 밝아 오전에는 전철을 타기도 걷기도 하면서 취리히 도시 투어를 했다. 리마트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과 두 개의 종탑으로 유명한 중세 건축물인 그로스 뮈스터가 조화롭게 어울린 모습이었다. 역시 특별한 사람들이 사는 특별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아직도 취리히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쿤스트하우스 취리히’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처음엔 별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대규모 작품들과 뭉크의 컬렉션, 코코슈카, 로스코, 피카소, 모네, 또 스위스 현대 미술가들의 훌륭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시간이 그렇게나 빨리 지나는 줄 몰랐고 정말이지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던 저의 인생 미술관이었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그곳을 떠나면서 반드시 다시 오리라 다짐을 했고, 취리히의 그 경이로움과 성스러움이 바로 ‘쿤스트하우스 취리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는 Julia Pass의 그림 같은 풍경을 통과하며 알프스산맥을 지나 생 모리츠를 향했다. 얼음이 녹아 만들어졌다는 비취색의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물길 옆으로 아름다운 길이 펼쳐졌는데, 이곳이야말로 카브리올레가 진가를 발휘하는 코스였다. 얼음 가득한 봉우리에서 불어오는 서늘하고 신선한 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하면서 목청껏 노래 부르며 달리다 보니 잡다한 생각, 근심들이 청량한 공기 속으로 다 사라져 버렸다.

 

 

그림엽서나 달력에 나올법한 아름다운 풍경들을 바라보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스위스 앵가딘 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대표적 휴양지 생 모리츠에 도착했다. 마치 동화 속 하얀 성처럼 생긴 Kempinski 호텔의 모습이 색색의 깃발과 함께 오랜 시간 운전해 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허기진 우리 일행은 구수한 퐁듀를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가는 길에 생 모리츠 호수를 따라 걸었다. 해가 서서히 지면서 맑디맑은 호수의 표면이 점점 푸른빛으로 물들고, 강 주위 집들에서 밝혀지는 불빛이 호수에 떨어지면서 보석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냈다. 호수 주변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하얀 꽃들도 저녁의 푸른빛을 머금고 안개처럼 뽀얗고 몽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해가 떨어지면서 호수뿐 아니라 우리도 점점 더 짙푸르게 물들어갔다.

 

 

생 모리츠가 겨울 스포츠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호텔 안에 걸린 그림들도 스키 타는 사람들을 그린 개성 있고 현대적인 작품이 많았는데, 모두 훌륭해서 컬렉터의 안목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편안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일찍 아침 산책을 나갔을 때 안개가 걸친 아름다운 산의 신성해 보이는 모습은 또 한 번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스위스는 정말이지 자연의 축복과 같은 곳이었다.

 

이제 스위스 국립공원을 지나 이탈리아를 향해 움직였다. 국경을 지나 이탈리아 땅에 접어들자 도로가 어느새 바뀌었다. 약간 울퉁불퉁한 노면과 관리가 잘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좀 아쉬웠다. 공룡이 떠오르는 ‘티라노’라는 이름의 높은 산 아래 마을을 지나는데, 자동차 도로와 거대한 나무들을 실어 나르는 기찻길이 나란히 달리는 특이한 길을 만났다. 오래된 건물들과 하늘을 가릴 만큼 높은 산, 기차의 경적소리가 어우러져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가르다 호수에서 향긋한 커피 한잔을 즐긴 다음 이번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되었던 도시 ‘베로나’로 향했다. 베로나에서 성대한 ‘오페라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오페라 ‘아이다’를 예약해 두었다. 베로나 곳곳에 오페라 축제를 알리는 조형물과 현수막들이 가득했다. 거대한 스핑크스 모형이 전 세계에서 오페라 애호가들이 찾아오는 축제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한 달 동안 오페라만을 위해 이곳에 머문다는 한국분도 있었다.

 

오페라 공연이 저녁이었기 때문에 그 전에 밀라노에 다녀오기로 했다. 밀라노에 도착해 지하 주차장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비가 퍼붓더니 조금 있으니 큰 것은 탁구공만 한 우박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렇게 큰 우박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는데, 신기하기도 했지만 맞으면 엄청나게 아플 것 같아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주차장 입구에서 바닥에 튕기며 떨어지는 우박들을 구경했다. 다행히 몇 분 만에 감쪽같이 우박은 그쳤지만, 빗방울은 계속 떨어졌고 아름다운 밀라노 대성당도 비에 젖어 있었다.

 

 

보슬비를 맞으며 대성당 꼭대기에 올라가서 밀라노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도 꽤 운치가 있었다. 날씨가 변화무쌍해서 밀라노 도심을 걸어 다닐 때는 비가 그쳐서 화려한 패션의 도시를 잘 감상할 수 있었다. 명품숍이 가득한 거리에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보면서 멋쟁이들의 도시라는 것을 실감했다. 가는 곳마다 북적이는 관광객들의 활기찬 모습들을 보니 “도시의 공기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마치 도시로 도망쳐 366일을 일하면 노예 신분이 해방되었던 중세의 농노라도 된 듯이, 모두가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 도시의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도 맛있는 점심과 약간의 쇼핑을 즐기면서 밀라노의 여유와 풍요를 조금 누려 보았다.

 

밀라노를 다녀온 날 오후에 ‘아이다’ 관람을 위해 베로나 아레나로 향했다. 이곳은 콜로세움처럼 생긴 고풍스럽고 거대한 석조 원형극장이었는데 공연을 보러온 엄청난 인파가 벌써 극장 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원형극장 맞은편으로는 사람들 가득한 카페가 쭉 늘어서 있었고, 멋진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키가 크고 매끈한 갈색 털을 가진 말을 타고 거리를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긴 줄을 선 끝에 드디어 원형극장 안으로 입장해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젊은 사람들부터 노년의 관객들까지 저마다 최고의 성장을 갖추고 있었다.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페라를 즐기기 위한 마음이 느껴졌고 바로 이것이 축제라는 것을 실감했다. 거대한 북소리가 오페라의 시작을 알렸고, 출연진과 무대장치들의 규모에 압도될 만큼 대단한 공연이었다. 그런데 아름다운 노래와 살랑살랑 불어오는 초여름의 향긋한 바람은 피곤한 저의 눈꺼풀을 한없이 아래로 잡아당겼고, 참으로 교양 없게도 그만 그 멋진 공연장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겨우겨우 버텨낸 제 생애 최고의 오페라 ‘아이다’는 이런 이유로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베로나에서 우리가 머무는 곳은 Tommasi 와인으로 유명한 와이너리 호텔이었는데, 이탈리아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긴 야외 테이블에서 여럿이 모여 와이너리의 다양한 와인을 곁들인 풍성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그 시간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미풍과 즐거운 대화, 그리고 부드러운 와인 한 잔이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다음날엔 트렌토, 볼치노, 카스텔 벨로의 아름다운 길들을 두세 시간 달려 메라노까지 이동했다. 크고 작은 이탈리아의 도로마다 국민차로 불리는 색색의 알파로메오를 마주쳤는데, 그 모습이 꼭 만화 속 귀여운 모기를 닮아 그림에 담아두었다.

 

 

메라노는 조용하고 깨끗한 작은 마을인데, 이곳에는 ‘씨씨’라는 이름의 아주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다. 꽃들이 만발한 골목길을 걸어 빨간 스푼 여러 개가 장식된 노란 페인트칠의 작은 집이 바로 이곳인데, 주인이자 쉐프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요리한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메라노를 출발해 오스트리아 외츠탈러 알프스산맥을 드라이브해서 다시 스위스의 장크트 갈렌에 도착했다. 숲속에서의 힐링을 위해 지어진 호텔에서 여행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 날 다시 슈투트가르트로 향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차들을 반납하고, 몇 가지 작은 기념품을 사면서 색달랐던 자동차 여행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기로 했다.

 

2019년의 두 번째 여정은 한여름의 남프랑스와 파리 여행이었고, 그 기억들을 그림과 함께 작년 서울시여자치과회에서 발간하는 ‘W Dentist’에 실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의 응원으로 이렇게 다시 여행에 관한 글과 그림을 이곳에 싣게 되었다.

 

어쩌면 특별할 것 없는 여행이야기지만 좋았던 기억들, 그때의 웃음 띤 얼굴들, 초록의 싱그러움과 빛나던 물결들을 그림 안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모두가 지치고 고립감을 느끼는 이 시기를 잘 극복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든 여행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오늘도 나는 더 많은 여행이야기를 캔버스에 마구마구 그려 넣을 수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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