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의 여백

2023.07.06 16:36:40 제1023호

치과진료실에서 바라본 심리학 이야기(620)

아무리 여러 번 반복해도 늘 어려운 일이 있다. 갑티슈에서 처음으로 첫 장을 뺄 때마다 한 장만 빼는 것이 어렵다. 늘 뭉치로 빠지기 십상이고 다시 집어넣기도, 다 사용하기도, 혹은 보관하기도 어정쩡해진다. 화장실에 비치된 페이퍼 타월도 마찬가지다. 청소아주머니께서 틈 없이 꽉 채워 놓으시면 처음 뺄 때 한 장만 빼는 것이 어렵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면 한 장씩 빼는 데 어려움이 없건만 빡빡한 경우에서 뺄 때마다 여유가 아쉽다.

 

언젠가 문득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도 꽉 채우기보다는 여유가 있어야 원활하다. 물론 방종이나 적당히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방종은 일이 성패와 상관없이 관심이 없어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적당은 대충 달성하겠지만 완성도가 떨어진다. 여유란 높은 완성도를 유지하며 급하지 않아 실수가 적어진다. 동양화는 여백의 미를 살려서 그림의 완성도를 높인다. 동양철학에서 완성되면 이후로 쇠퇴하기 때문에 흉으로 보고 경계하였다. 동양에서 짝수보다는 홀수를 더 좋아하는 이유다.

 

주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너무 높이 오른 용은 반드시 후회를 남긴다는 뜻이다. 공자는 너무 높이 오르지 말고, 올랐다면 극히 삼가고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옛날 경상도 어느 부자는 농사를 짓고 팔 할만 수확했었다.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도 가져가고 짐승도 먹고 벌레도 먹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런 가훈으로 덕망을 쌓아 대대손손 부자였다.

 

얼마 전 길을 지나다 편의점 문 앞에 적힌 글귀에 관심이 갔다. “여기는 길목이 아닙니다. 용무 외 분들은 돌아가세요”였다. 내용인즉, 편의점이 입점한 건물 양옆으로 큰길이 있고 그 중간에 건물이 놓인 구조다. 큰길 양쪽에 문이 있어 편의점을 관통하면 반대편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되어 건물을 돌아기지 않아도 된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편의점에서 물건은 구매하지 않고 단순히 통로로만 이용했다. 이에 불만을 지닌 점주가 붙인 문구다. 점주의 얕은 안목이 아쉬워 눈길을 끌었다. 장사의 기본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고 쫓아내거나 방해하면 안 된다. 옛말에 술이 맛있어도 주막집 개가 사나우면 술이 쉰다는 말이 있다. 술 심부름을 가는 아이들이 개가 무서워서 맛있는 집을 피하고 다른 집에서 술을 사기 때문이다. 무서운 개가 있는 집은 술이 맛있어도 술이 쉬도록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을 쫓아내는 요인이 있으면 안 된다는 충고다. 편의점은 도로 사이에 놓인 지정학적으로 사람을 모으는 좋은 이점을 포기한 것이다. 원래 한두 번 길을 이용하다 보면 물건을 사기도 한다. 도로 이용자는 잠정적 고객이기에 일부러라도 이용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할 판에 못하게 막으니 차단당한 사람들은 내면적으로 화가 나서 그 편의점을 결코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점을 악심으로 바꾸는 경고문을 붙인 점주는 혼자만 모르니 안타깝다.

 

스스로 장사수완이 없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귀찮아서거나 마음에 여유가 없는 탓이다. 손님인줄 알고 기대했는데 물건은 구매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실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기다려주면 그들을 충성 고객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탓도 있다. 혹은 상업적 마인드가 아닌 고객 배려 차원에서 길을 터주어도 똑같은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이 약간 남보다 지능이 떨어지지만 성실성과 남다른 여유로 성공에 이른다. 100% 성공만 바라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라는 교훈과 경험을 얻을 수 없다. 성공은 실패를 포함하고 있고 실패 또한 성공을 포함하고 있다. 성공을 위한 실패가, 실패에 포함된 성공이 여유이기 때문이다. 페이퍼 타월처럼 여유가 실패를 낮추고 성공을 높인다. 그러기 위해서 한 번에 꽉 채워서 일거리를 줄이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마음의 여유를 지녔다면 지름길을 내줄 수 있었다. 혹은 배려할 수도 있었다.

 

마음에 커피 한잔 마실 정도의 여유만 있어도 삶이 팍팍하지 않을 수 있다. 장맛비 속에 맑은 하늘이 보인다. 자연이 보여주는 여유다.

 

기자
본 기사의 저작권은 치과신문에 있으니, 무단복제 혹은 도용을 금합니다

주소 :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나루로 257(송정동) 치과의사회관 2층 / 등록번호 : 서울아53061 / 등록(발행)일자 : 2020년 5월 20일 발행인 : 강현구 / 편집인 : 최성호 / 발행처 : 서울특별시치과의사회 / 대표번호 : 02-498-9142 /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