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볼 수 있지만, 렌즈로만 보이는 무언가를 담기 위해

2023.10.16 11:53:55 VOL.177/2023가을겨울호

글 / 이혁상 원장(W치과의원)

전공의 시절부터 사진을 많이 찍기는 했지만,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찍지는 않았던 것 같고, 그냥 아름다운 장면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행위 자체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개업 4년차에 처음으로 가게 된 휴가지인 보츠와나에서 초베 국립공원으로 사파리 투어를 가게 되었는데, 사파리 투어의 꽃이라는 레오파드는 첫 날 투어에서는 그림자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두 번째 날에도 투어를 신청했지만, 계약된 2시간 반 중에서 2시간이 거의 다 가도록 레오파드는 만날 수 없었는데, 순간 다급한 무전이 오고 가더니, 제가 탄 사파리 차량이 어딘가로 급하게 이동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운명의 순간을 마주했습니다.

 

나무 위에 있던 한 마리의 레오파드. 나무 주변에 차량이 10여대 주차되어 있었지만, 딱 제 정면에서 마치 찍어달라는 듯 렌즈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 녀석을 정신없이 카메라에 담았고, 이 녀석이 사라진 뒤에야 ‘아, 저 레오파드는 나랑 만날 운명이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사는 곳도 수 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마침 여기에 휴가로 온 지금 딱 내 앞에 있을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난 후부터 사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 사진은 작가와 피사체가 만나는 인연의 순간을 담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는 그런 생각을 담은 사진을 찍게 되어, 이를 모아서 한 전시가 2016년에 연 첫 개인전인 ‘Moments of Serendipity’입니다.

 

 

좀 더 진지하게 사진을 계속 찍어가면서 항상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로라를 찍으러 극지방에 가보기도 하고, 태즈매니아 같은 오지에 가보기도 하고, 조금은 낯선 쿠바 같은 곳에 가 보기도 했지만, 결론은 아무리 해도 현지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촬영하는 사람들 보다는 좋은 사진을 찍기는 어렵다는 것이었고, 또한 그 마저도 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찍을 수 있는 피사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물에 비친 풍경 사진을 찍다 보니, 매순간 변화하는 물결에 반영되는 이미지들은 결코 재연될 수 없기에, 그 순간을 담는 것은 유일무이한 작업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촬영한 이미지들을 모아 2020년 ‘REFLEXION(반영)’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반영된 풍경 사진을 계속해서 찍다 보니, 어느 날 문득 현실을 배제하고 물에 반영된 이미지를 분리해서 보게 되었고, 현실과 관계없이도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모아서 ‘Simulacrum’이라는 시리즈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Simulacrum’이란 철학 용어로 간단하게 설명하면 현실의 모방이지만, 현실과는 독립적인 새로운 가치를 가지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이미지만 출력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이미지를 보면 흔들리는 물결에 비친 풍경이 마치 유화 같은 느낌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하면 이런 느낌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을까 하다가, 인쇄된 표면에 투명 아크릴로 질감을 부여하면 가능하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캔버스에 인쇄된 사진 위에 투명 아크릴을 덧칠해서, 사진에 질감도 부여하고, 사진이 가진 예술적인 측면에서의 단점인 무한 복제가 가능한 결과물에 유일무이성을 부여하는 데에도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이 사진과 페인팅의 경계 정도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어서, 2023년 6월에는 이러한 작품들을 모아서 ‘Camera Obscura’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했습니다. ‘Camera Obscura’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카메라의 전신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화가들이 풍경화의 밑그림을 그릴 때에도 사용했던 도구입니다. 최근의 작업들에서 저의 사진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으로 사용되고 있고, 이러한 것들이 사진기가 가졌던 본래 용도로의 회귀라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한 제목입니다.

 

 

사진가의 숙명은 남들이 접하기 힘들거나, 아니면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깨닫지 못해서 보지 못하는 풍경들을 기록으로 남겨서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필자는 그러한 기록에 유일무이성을 부여해서 작품을 관람해주는 분들께 시각적인 즐거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작업을 계속해나갈 생각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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