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새해도 벌써 보름 이상이 지나갔다. 필자는 요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의 시대적배경이 필자가 살아온 시기와 비슷했다. 엄밀히 말하면 필자보다 선배인 파독광부, 파독간호사의 이야기, 그리고 필자 세대와 같은 월남 파병 시대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화를 통해 지난 시절 필자의 모습을 재조명해봤다.
6.25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950년 초, 피난민이 몰려들던 부산의 모습이 영화 속에서 실감나게 표현됐다. 직접 겪은 일인지라 영화를 보면서 마치 필자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5세부터 기억력이 생긴다고 한다. 어린 시절 기억은 뇌리에 깊숙이 각인돼 지금도 현실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해방 직후 필자의 가족은 개성에서 살았다. 6.25 전까지만 해도 개성은 남한 땅이었으나, 개성 송악산에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이북 땅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1949년 5월 4일, 북한군이 진지 구축을 위해 38선 남쪽으로 쳐들어왔다. 이를 막으려는 국군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6.25 발발 1년 전에 있었다고 한다. 북한 인민군의 포탄 공격에 두려움을 느낀 부모님은 할머니와 당시 2살 된 필자를 데리고 부산으로 일찌감치 피난을 떠났다.
6.25 발발 1년 전에 부산에 왔다는 것은 필자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찍 피난을 내려온 덕분에 자리도 일찍 잡았다. 아버지의 무역사업이 날로 번창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필자는 1952년부터 유치원을 2년이나 다녔다. 언덕 위에 있는 유치원을 할머니와 함께 오가다 넘어져 다친 기억, 부산 5육군 병원의 유아유희에 참여하고 미군들로부터 초콜릿을 선물 받은 기억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국제시장’에 나온 흥남철수 작전과 같은 끔찍한 일을 겪진 않았지만, 누더기 옷을 입고 부산에 몰려든 피난민의 기억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산마다 피난민의 천막과 골판지로 지은 판잣집이 줄을 이었다. 1954년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에 입학했다. 학생 수는 한 반에 80명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한 인구의 대부분이 부산에 집중돼 있었다.
구봉산 기슭에 판자로 지은 가건물에서 1학년을 보내고, 2학년부터는 미군이 쓰던 본교 건물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은 검정 고무신을 꿰매 신었고, 양말도 구멍이 나서 천을 덧대기 일쑤였다. 책가방은 아주 부유한 집 아이나 돼야 멜 수 있었다. 대부분은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을 함께 싸서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 다녔다.
동그란 양은 도시락엔 꽁보리밥, 무말랭이, 멸치볶음이 주로 담겨졌고, 부자집 아이들은 계란 부침을 싸오기도 했다. 책상은 나무판자를 잘라 만든 탓에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바닥은 마루로 돼 있었고, 매일매일 학생들이 닦아서 항상 반들반들했다. 점심시간에는 미군이 쓰고 남은 전지분유로 끓인 우유를 한 국자씩 부어주었다. 지금 먹으라면 엄두도 못 내겠지만, 당시 그 구수한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소풍을 갈 때면 어머니가 싸주신 비스킷 한 개와 사과 한 개, 그리고 사이다 한 병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안고 잠을 설쳤다. 가난한 아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비가 와 소풍이 취소되길 바라기도 했었다. 또 당시에는 쥐가 그렇게 많아 쥐꼬리를 잘라 학교로 가지고 갔던 기억, 점심시간이 끝나면 이를 잡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고 서서 DDT를 뿌린 기억도 난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오죽하면 북한보다 못살았다고 했겠는가! 하굣길에 나서면 우리 또래의 아이들이 나무통을 메고 아이스깨끼를 외치고 다니던 시절. 먹고 살기에 급급해 배운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을 때다. 간식이라곤 눈깔사탕이 전부였다. 잘 녹지도 않아 하루 종일 입에 물고 다녔다.
학교 운동회 날에는 청군백군으로 나뉘어 장대에 매달린 큰 원통을 향해 오재미를 날렸다. 고무줄을 끊어 여학생들의 놀이를 방해했던 짓궂은 친구들. 사라호 태풍으로 집이 날아간 친구들의 울음소리. 자갈치시장에 놀러갔다가 트럭에서 떨어진 전갱이 한 마리를 주워와 친구들과 함께 구워먹기도 했다. 당시 함께 뛰놀던 친구들이 이제 70세의 노인이라니… 당시의 일들이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 다시 새롭게 느껴진다.
중학생이 됐을 때 상경했다. 외삼촌댁에 기거하며 중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에는 만화책의 인기가 대단했다. 만화방도 경쟁이 심해, TV 수상기를 갖춰야만 장사가 잘됐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스포츠는 프로레슬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만화방 2층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TV를 보다가 2층이 무너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또 당시에는 구멍가게에서 전화를 주로 걸었는데, 시골에 있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 때 구멍가게 주인은 옆에서 시간을 재고 돈을 받았다. 요금이 무서워 전화도 마음껏 할 수 없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도 “요금 많이 나온다. 전화 빨리 끊어라”라는 말씀뿐이었다.
중학교시절 우리형님뻘 되는 사람들이 광부와 간호사가 돼 서독으로 떠났다. 이국에서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들이 보낸 외화가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종잣돈이 돼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같은 산업시설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온 국민들은 기뻐 날뛰었다. 또 비둘기부대, 청룡부대를 필두로 월남에서 많은 외화가 들어왔다. 이 또한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토대가 됐다. 88년에는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중진국이라는 자부심이 생겼다.
대학생이 된 어느 날, 필자가 다니던 부산의 초등학교를 찾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렇게 넓고 웅장했던 2층 본관건물이 동화속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작은 운동장에서 뛰놀던 기억이 필자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젊은이는 미래를 그리며 살고 늙은이는 과거를 먹고 산다고 했던가! 전광석화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서, 디지털의 문명 속에서 옛 추억은 마음을 녹여주는 묘약과 같다. ‘국제시장’이란 영화 덕에 쑥스러운 옛 추억을 되짚어 보았다.
황진이의 시조가 생각난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人傑)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오노매라.’ 그 옛날 웃고 뛰놀던 그 자리는 그대로 있는데 같이 웃고 놀던 친구들은 그 자리에 없다. 세월이 흘러 하나둘, 그때 친구들이 사라져 가는데, 그때의 웃음소리와 그때의 모습은 그들의 추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겠나?
아른거리는 추억을 가슴에 품고 내일을 위한 새 삶을 깨워야겠다. 주머니 속에선 휴대폰 문자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