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쪽 지리산 뱀사골 인근의맛있는 부엌에서 제철음식학교, 시의적절약선학교, 우리장학교, 김치학교 등을 운영한다.
가능하면 작은 냉장고 하나만 사용해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건 머릿속 생각일 뿐 실제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냉장고를 사용하면서 살고 있다. 오래 두고 먹고 싶고, 오늘 다 먹지 못해 남긴 것은 다음에 먹기 위해 냉장실이나 냉동실에 저장해두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바로 잊어버린다. 그러다 그 냉장고 속 깊숙한 곳에 있던, 기억도 가물가물한 음식과 식재료들이 음식물 쓰레기가 되는 시점이 오게 된다. 이쯤되면 죄책감이 나를 몰아부친다. 냉장고 정리를 할 때마다 매번 반성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지만 개선되지 않고 늘 반복되는 일이다. 이글을 쓰는 오늘도 또 반성을 한다. 고질병이다.
농사를 기반으로 살았던 외가에서는 농작물이 나오면 우선 내다 팔고 남는 것을 집에서 드셨다. 그중 일부를 이웃과 나누고 또 이웃으로부터도 그렇게 나눔을 받으셨다. 냉장고 없이 살던 시절의 기억이다. 팔고, 먹고, 나누고도 남는 것은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 저장해두고 1년을 먹었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덜 먹는 식생활이었던 것 같다. 조금 부족하지만 이웃과의 나눔에서 저절로 풍성해지는 식생활이기도 했다.

김치냉장고가 처음 나왔을 때 무척 사고 싶었다. 남편이 가욋돈이 생겼다고 사주었는데, 김치를 자주 담그지 않아도 되어 좋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혼을 하면서 그 당시 제일 컸던 370L짜리 냉장고를 샀지만 여름이 되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김치통 들어갈 자리가 없으니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이삼일에 한번씩 김치를 담는 전쟁을 치뤘기 때문이다. 찬 샘물에 김치단지를 넣어두던 때에 비하면 천국이었지만, 김치가 시어져서 어쩔줄 몰라했던 때라 김치냉장고의 등장은 신세계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김장김치가 일년내내 냉장고에 있으니 제철 김치 담그는 행동이 게을러졌다. 김치냉장고에는 먹다 남은 철 지난 김치들이 쌓여 가고 새김치 들어갈 자리가 없어졌다. 결국 지난 김치는 버리게 되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묵은지의 맛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묵은지가 맛있다고 일년내내 삼시세끼로 묵은지를 먹지는 않으니 새김치가 필요해졌다. 묵은지만 먹다가 새김치를 먹으면서 느끼는 신선함이란… 새김치는 새로 담은 김치이기도 하지만
제철에 나오는 제철 김칫거리로 담그는 새로운 맛의 김치를 말한다. 김장김치가 떨어질 무렵에 나박김치를 담그고, 나박김치를 담가 먹다 부추가 올라오면 부추김치를 담근다. 그 무렵 돌나물도 올라오니 월동무를 더해 돌나물물김치를 담그기도 한다. 제철 재료로 담그는 김치의 이어달리기를 하면서 1년이 흐른다. 우리의 몸은 그렇게 제철에 나오는 재료들로 만들어진다.
나는 북쪽 지리산 인근에서 십여년 째 제철음식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니 제철음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초기엔 제철에 나오는 식재료로 만드는 음식, 건강해지는 음식이라고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제법 정리가 되었다.

‘자연의 속도로 자라는 재료’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1년을 기다렸다 먹는 음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제철의 재료가 주는 맛을 경험하면 진심으로 1년이라는 시간을 기꺼이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 봄기운 난만한 어느 날에 먹은 두릅이 맛있다고 냉동을 해두는 분들께 여쭙는다. 과연 여름에 그 두릅을 꺼내 먹기는 하는지, 그렇게 꺼내 먹는 두릅이 맛있기는 했었는지. 나는 냉동실에서 꺼낸 봄나물들이 한번도 맛있어 본 적이 없었다.
봄에 맛있었던 두릅은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그 맛은 그 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겨울에 오이나 수박을 먹자고 비닐하우스를 지어 가온을 하면서 키울 일은 아닌 것이다. 자연의 속도로 나오는 제철음식을 먹으면 우리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도 건강해진다, 모두가 건강해진다.
제철에 먹는 식재료는 특별히 더 싸고, 더 많이 나오고, 더 맛있다. 제철이 아닌 때 귀하다며 비싸게 식재료를 구해 먹을 이유가 없다. 겨울에 먹는 수박이 우리 몸을 더 건강하게 하지 않는다. 여름에 흔하고 저렴한 호박이 오히려 우리 몸을 더 건강하게 만든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공식이 제철식재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며칠 전 나는 1접(100개)의 오이지를 담갔다. 분명히 모자라 다시 한번 담가야 할 것이다. 오이지가 맛있다고 나눠받기를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서다. 요즘 나오기 시작하는 햇오이들이 아주 맛있다. 흐르는 물에 씻어 껍질째 한입 베어물면 과일을 먹는지, 채소를 먹는지 구분이 안 가게 달고 맛나다. 일하다 지칠 때는 생으로도 먹고, 무치거나 볶아서 반찬으로 상에도 올린다.
여름 반찬 중 최고는 오이지와 오이소박이다. 오이소박이는 여름에 몇 번 조금씩 담가 빠르게 먹어치운다. 오래 두고 먹으면 탈색이 되면서 물러지고 맛이 덜하기 때문이다. 오이지는 한꺼번에 많이 담가 무쳐서 먹거나 물을 부어 시원하게 먹는다. 여름이 가고 아직 남은 오이지가 있다면 (나는 일부러 남기지만) 하루이틀 꾸덕하게 말려 장항아리 속에 깊숙이 박아놓는다. 신선한 오이가 없는 겨울에 꺼내 송송 썰어 무치면 이것이야말로 밥도둑이다. 오이를 통에 담고 소금물만 끓여 부으면 되는 아주 쉬운 김치의 원형이 바로 오이지다. 오이가 싸고 흔할 때 충분히 먹고 겨울엔 참을 줄 아는 사람으로 산다.

잉여농산물이나 잉여수산물을 소금에 절이고 말려 장에 넣어두는 윗대 어른들의 지혜에 큰 깨달음을 얻는다. 냉장고에 오래 두고 나 혼자 맛있게 먹자고 하는 현재의 나와 다르게 나눔 속에서 오히려 풍요를 즐겼던 선조들의 식생활에서 많이 배운다. 그래서 자꾸 냉장고를 비우려 하고 이웃들과 나누려고 애쓰면서 산다.
겨울에 건강에 좋다고 굴을 냉동해 둘 게 아니다. 안달나게 봄을 기다리게 하던 참죽나무순도 기껏해봐야 김치를 담가 시간을 조금 늘여 먹는 게 고작이다 나는. 가을무가 아무리 달고 맛있어도 김장에 충분히 넣고 겨울내내 무밥, 무나물, 무생채 등을 해먹는 것으로 감사하며 산다. 흔하게 나올 때 맛있게 먹고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봄의 새싹과 새순들이 모진 겨울을 이기고 나왔으니 그 생명력이 나를 키울 것이고, 무더위에 푸르게 자란 채소들이 우리가 느끼는 무더위를 이기게 해줄 것이라 그렇게 살기로 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환절기라며 몸이 피곤하고 아픈 것을 당연해하지 말아야 한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기운이 담긴 맛있는 음식들로 건강을 지킬 수 있다. 제철음식을 먹으면 제철의 그 맛있음이 건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온다. 제철음식, 100세 건강을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 함께 즐길 일이다 반드시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