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은 다양하고 그 다양성이 모여서 하나의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가장 쉬운 이치이다. ‘세상’이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로서 한자어로는 世上이라고 하여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世相이라는 한자어로 사전적 의미로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풍습 따위에서 보이는 세상의 상태나 형편’이라고 한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형태로 일명 세태라고도 하기도 한다. 필자는 한마디로 ‘다양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世上에 나타나는 일들이 世相이니 결국 세상은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 여름날에 들에 핀 수많은 들꽃을 보면 이름 모를 꽃들까지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다운가. 그런데 만약 한 종류의 꽃만으로 다 이루어져있다면 한 순간은 아름답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싫증나고 지루해진다. 결국 다양성이 다양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세상이 그러하듯이 사람도 다양하다. 지구 위에 어느 사람 한명도 똑같은 이가 없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외모적으로는 유사할 수 있으나 성격까지 비슷하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런 인간의 다양성 중에서 개개인의 성격의 다양성을 개성이라고 한다. 개성은 한 개인의 특성으로 타인과의 차별성을 지니고 개인으로는 존재감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개성이 존중받을 때 삶의 가치를 느끼고 자아존중감이 높아진다. 세상의 다양성이 아름다움을 창조하듯이 한 개인의 다양성도 한 개인의 삶을 훌륭하게 창조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은 획일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학력과 성취일변도로 흐르고 있다. 부모는 자식의 개성을 고려하지 않고 심지어는 무시하거나 말살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어가려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자신이 가진 개성을 발견하기도 전에 스스로 개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자신의 다양성과 개성을 발견하며 성숙해야할 청소년 시기에 개성과 정서를 만들 기회조차 상실하게 된다.
생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신장이 최대로 발달하는 최고성장기에 풍부한 영양을공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창 골을 만들 때에만 골밀도가 증가하고 성장이 종료된 다음에는 아무리 많은 영양을 공급하여도 골밀도가 전혀 증가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정서와 개성과 자아존중감도 성장 발달 시기에 형성되어야한다. 실험과 조사에서 인간이 사회적 언어를 인식하고 배울 수 있는 나이를 14세 정도로 이야기한다. 정글에서 동물들과 생활하며 자란 아이가 14세가 넘으면 영원히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결국 신체나 마음이나 한 인간에 관련한 모든 것은 성장발달 시기에 발달하지 않으면 결국은 소멸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심지어 진화론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은 퇴화시키기까지 한다. 의료에서도 disuse atrophy는 상식이 아닌가. 결국 성장기에 있어서 한 개인의 다양성이 존중되어지면 그는 훌륭한 개성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성이 존중되어야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하지만 사회적인 고정된 인식 속에서 다양성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다양성을 인정해주기보다는 ‘루저’라고 인식하고 받아드릴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천재들이 처음에 루저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천재로 나타나는 경우는 적고 대부분은 그냥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한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든 모자라든 다양성으로 존중 받을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라는 인생의 대전제에서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존재로서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따스한 봄날의 들판에서의 아름다움은 어느 한두 개의 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작고 하찮은 작은 돌멩이와 이름 없는 들풀이 만들어낸 하모니이다. 큰 세상 속에서 개인의 존재는 작으나 그의 역할은 전체의 하모니에 가장 필요한 존재이다. 작다는 다양성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다양성의 인정이 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