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담은 충주호반에서

2014.11.17 13:59:50 제613호

손창인 원장의 사람사는 이야기 - 34

우리는 고치령의 낙엽이 카페트처럼 깔려 있는 황금물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거의 다 내려올 즈음 붉은 단풍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황금빛의 세계에세 처음 맞이하는 적색의 세계. 우리는 그 단풍 속으로 들어가 잠시나마 안홍(顔紅)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떨어진 붉은 낙엽은 붉은 양탄자가 됐다. 그 위에 누어 주위를 바라보니, 산도 붉게 보이는 산홍(山紅)은 물론이고, 시냇물마저 붉게 물들인 수홍(水紅)까지 느낄 수 있었다. 잠시나마 우리는 삼홍(三紅)의 세상 속에 빠져들었다.

 

해가 서산으로 저물 즈음 허기를 느껴, 고치골 순두부집으로 향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만남의 인사로 손수 재배한 배추를 일행 모두에게 한 포기씩 선물했다. 달기가 그지없는 배추, 우리는 주인 아주머니의 성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인심도 좋아, 음식도 무한정으로 채워줬다.

 

꿀맛 같은 식사를 마음에 담고, 김삿갓의 고향 의풍리로 향한다. 의풍리는 충청도와 강원도의 경계다. 계곡이 너무 깊어 햇살이 잘 들지 않았다. 김삿갓 노래가 흘러나오는 남고문학관에서는 김삿갓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다. 양지바른 한편에는 김삿갓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온 동네가 김삿갓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 김삿갓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일게 만든다. 묘지기의 구수한 해설 중 마음에 남는 시 한 수를 되새겨 본다.

 

‘석양에 시립문 두들이며 멋쩍게 서있는데, 집주인이 세 번이나 손 내저어 물리치네. 저 두견새도 야박한 풍속을 알았는지 돌아가는 게 낫다고 숲속에서 울며 배웅하네.’ 방랑시인 김삿갓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시로, 당시의 메마른 인정을 보여준다.

 

관광객이 와글거리는 의풍리를 뒤로하고, 험준한 마구령을 넘어 영주 부석사로 향했다. 석양이 드리운 오후 4시 30분, 부석사의 경내는 온통 가을빛에 젖어 있었다. 경내 호수에 서면 가을수채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게 한다. 해가 서산에 지자 금세 밤의 그림자가 찾아온다. 세상에 커튼을 내리운 듯 만추의 밤은 그렇게 순식간에 찾아왔다. 일행은 남한강가에 자리 잡고 있는 숙소 ‘어울림’으로 향했다. 일행의 자동차 소리를 듣고, 주인부부가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전에 한 번 들려서 그런지 남 같지 않게 일행을 맞이한다.

 

차여사 부부는 필자와 비슷한 또래의 은퇴부부로, 이곳에서 자연과 함께 노후 인생을 가꾸기로 한 것 같다. 직접 밭에서 일군 푸성귀를 대접하는 그들의 넉넉한 인심이 살갗처럼 느껴진다. 소금구이 삼겹살 굽는 냄새가 퍼져나가고, 우리들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다음날 새벽 산속의 지빠귀 노래 소리에 잠을 깼다. 밖에 나오니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그렇게 울어대던 지빠귀 소리가 잠시 멈출 때쯤 앞내 하일천의 물소리가 크게 들리며 정막을 깨운다.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에 움츠리고 있던 생명들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편다. 검은 그림자를 벗어버린 펜션정원의 단풍나무는 “나 여기 있소”라고 말하듯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필자는 가을 정원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여성 대원들의 아침식사 준비가 한창이다. 두루치기 김치찌개 냄새가 흘러나올 즈음, 식사준비가 다 됐다며 불러댄다. 이 아름다운 단풍 속에서 먹는 두루치기 김치찌개 맛은 꿀맛 그대로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 듯 아침을 먹고, 밴에 올라탄다. 주인 차여사 부부가 입구까지 나와 배웅을 한다. 헤어질 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또 들려주세요”라는 주인 부부의 인사말을 뒤로하고 일행은 손짓으로 이별을 고한다.

 

고수재를 넘어 단양으로. 어제와 오늘 경상북도, 강원도, 충청북도 3개도를 종횡무진 달렸다. 도담삼봉 관광지를 둘러보고 라이딩을 시작했다. 하괴리를 지나 5번국도로 남하, 상진대교를 건너 북하리에서 36번 월악로로 갈아타고, 남한강변을 누빈다.

 

남한강변의 가을은 이미 깊어, 갖가지 색으로 일행을 유혹한다. 파란  빛깔의 강은 하늘을 담은 듯 주변의 가을을 물그림자로 나타내어 보여주는데, 그 풍광을 보며 달리는 일행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장회나루에서 보이는 373m의 구담봉은 명불허전이다. 해금강이라 할 만큼 바위의 색감이 신비하게 우뚝 솟아 있다. 계란재를 넘어 수산리에서 82번 도로로 갈아타고, 본격적인 충주호반 라이딩에 나선다. 계속되는 업힐 라이딩. 산속의 지방도로는 구절양장처럼 구불거리는데 한 굽이 돌때마다 가을단풍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업힐에 힘이 들건만, 가을 경치에 취해 힘든 줄 모르고 계속 오른다.

 

이 길을 청풍호로라고 한다. 물태리로 내려서니 멀리 청풍면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청풍대교의 아치가 바라보이는 청풍문화재단 앞에서 휴식을 취한다. 청풍문화재단은 1985년 청풍호 연안 망월산성 기슭에 조성됐다. 남한강 상류인 이 일대에서는 구석기 시대 유적이 곳곳에 발견됐다고 한다. 1978년부터 시작된 충주다목적댐 건설로 제천시 청풍면을 중심으로 5개면 61개 부락과 충주시 일부가 수몰되자 이곳에 있던 문화재를 한곳에 모아 청풍문화재단을 조성했다고 한다.

 

청풍문화재단을 둘러보고, 호반도로를 달려 금월봉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뒹구는 낙엽에 홀려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다시 페달을 밟아 금성면 사무소 부근 구룡교차로에서 532번 도로로 갈아탔다. 본격적인 충주호반라이딩이 시작된다. 굽이굽이 도는 10%의 고갯길, 비포장이다. 언제나 그렇듯 포장도로보다 비포장도로가 재미있고 자연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이 충주호에 그린 황홀한 비경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언덕에 있는 정자에 올라 마치 옛 선비가 된 듯 가을을 본다. 등 뒤로 낙엽이 계속 떨어지는 충주호가 못내 아쉬워 마음은 남겨두고 몸만 돌아선다. 후산리 포구를 돌아가는 일행은 70이 다된 나이도 잊은 채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속으로 빠진다.

 

다시 마지막 다운 힐, 저 멀리 부산교가 보인다. 부산리 이정표 앞에서 페달을 멈춘다. 어제 40km, 오늘 95km를 달렸다. 석양이 지는 부산리에서 일행은 두 팔을 높이 들고는 이틀간의 라이딩을 자축했다. 호젓한 부산리 포구에서 환상적인 가을의 추억을 충주호반에 남기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린다. 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충주호반에서 일행을 실은 밴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충주호의 가을과 함께.

기자 ys@sd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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