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의에 불타오르며 치협 기원 자료를 정리하던 필자는 최근 치협 기원에 관한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대한치과의사협회 제31대 이상훈 집행부가 기원에 대하여 전체 회원을 대상으로 폭넓고 다양한 의견을 듣겠다는 계획과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현재의 치협 창립기념일을 재조명하겠다는 공식적인 의사표명을 한 것이다. 특히 충분한 시간을 갖고 치협 창립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념일을 찾겠다는 31대 집행부의 강한 의지에 박수로 환영하고 응원하겠다.
일제강점기 ‘조선치과의사회’ 명칭에 관한 씁쓰름한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현재 치협의 기원으로 결정되어 있는 1921년 창립한 조선치과의사회는 1932년 각 지방 치과의사회를 단체에 가입시킨 후 명칭을 조선연합치과의사회로 변경하였다. ‘조선치과의사회’의 주인이 없어지게 된 셈이 되자마자 치과의사 시험제도를 통해 면허를 취득한 치과의사들의 권익 단체인 동인회(同人會)는 단체 이름을 1933년 조선치과의사회로 변경하였다. 동인회는 1930년 서울의 치과의사 13인이 창립한 조직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다른 정보 즉 회원들의 국적 등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단체는 일본인 치과의사회장의 압력을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1938년 그들의 단체명을 조치회(朝齒會)로 개칭하여야만 했다.
조선연합치과의사회 회장인 도내가와 세이지로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다른 단체의 조선치과의사회 명칭 사용을 중단하게 하였다. 1941년 조선연합치과의사회는 시대 상황에 맞춰 회를 개조한다는 이유로 단체명을 다시 ‘조선치과의사회’로 부르게 하였다. 조선치과의사회의 탄생, 명칭 변경 그리고 명칭 사용에 관한 모든 것이 일본인 치과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참담한 역사를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 땅에 설립된 치과의사 단체를 운영하는 가장 첫 번째 기준은 바로 일본의사회 법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창립된 치과의사 단체이기에 이러한 운영 원칙은 일견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철저하게 일본의사회 법을 준수하였던 1921년 조선치과의사회를 우리의 뿌리라고 한다면 현재 3만 회원 중 얼마나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조선에서의 치과의사회는 일본의 의사회에 준거하여 운영되어 왔음을 전제하였다. (중략) 조선에서는 조선연합치과의사회가 있어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개인적으로 치과의사회를 옥상가옥처럼 만들어 통제를 어렵게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조선치과의사회 창립 15주년 기념 좌담회 기록 중 발췌]
아래 좌담회에서는 세 가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1921년 창립된 조선치과의사회는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될 때까지 24년 동안 존속하였는데 회장은 모두 5명의 일본인 치과의사가 역임하였다. 1921년 조선치과의사회의 헤게모니는 언제나 일본인 치과의사에게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료다[그림 1]. 둘째, 조선치과의사회의 주된 창립 목적은 입치사 문제 해결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로부터 의사회(醫師會)와 같은 대우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한국인 치과의사로만 구성되어 창립된 한성치과의사회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정식적인 치과의사 단체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이다[그림 2].
세 번째 원고를 쓰는 기간 내내 일제강점기에 치과의사 출신 독립운동가 최금봉, 노선경 두 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두 분의 피와 땀, 눈물이 담긴 헌신이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치협 기원은 반드시 다시 정해져야 할 것이다[그림 3].
1936년 7월 17일 조선치과의사회 창립 15주년 기념 좌담회 지면 중계 (지난호에 이어)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 (중략) 총회는 1년에 한 번밖에 열지 못해 회기 중에 의안에 내놓고 개회할 수가 없었다. 의안을 내놓기 전에 충분히 연구해서 회원 다수의 양해를 얻어야 했다. 그래서 4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 당시 8개 정도밖에 회가 없었다. 그것을 간신히 권유해서 지방마다 치과의사회를 만들게 하여 12개 단체가 되었고, 간신히 조선연합치과의사회가 성립한 것이다. 창설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운영하는 데도 무척 애먹었다.
(중략)
니기라 다쓰미(柳樂達見)[그림 4] : 연합치과의사회 회장은 도내가와 씨가 가장 많이 맡지 않았는가?
(중략)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 초대회장은 나라자키 씨인데 얼마 안 가서 사임하는 통에 내가 부회장 직분으로 회장 대리를 1년 동안 했었다. 그 후 회장 보궐선거에서 이이즈카토오루(飯塚徹飯塚) 씨가 선출되었다.
니기라 다쓰미(柳樂達見) : 그러니까 회장은 나라자키, 이이즈카, 도내가와, 오오자와 순으로 이어졌었군.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 조선치과의사회의 제1회 총회 때 회장은 나라자끼 도오요오였는데 1개월 후에 동경으로 귀국하게 되어 사임했다. 따라서 부회장인 내가 1922년 총회까지 회장 대리로 회무를 처리했었다. 그 후 1922년 10월 총회에서 회장 보궐선거를 치른 결과 이이즈카 토오루 씨가 선출되었다. 1923년 총회는 관동 대지진으로 열지 못하여 임원들은 그대로 역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4년 6월 이이즈카 토오루 회장이 사표를 내서 다시 내가 회장 대리를 맡게 되었다. 결국, 3년간 부회장으로서 회를 이끌어온 셈이 되었다. 그 후 1924년 제3회 총회에 와서는 비로소 정식으로 회장이 되었고 부회장에 소토게이조(外圭三) 씨가 되어 2년간 근무하게 되었다. 1926년 10월 제4회 총회부터는 소토게이조에게 회장을 부탁하고 나는 2년간 쉬었는데 또 다시 1928년 10월 총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어 그 후 3회 연속 6년간 유임하게 되었다. 그 기간에 회를 연합회로 재편하기에 주력했고, 충치 예방의 날을 시작하는 등 여러 가지의 기초 작업을 이루었다. 아무튼 내가 구상한 일은 대체로 성취한 셈이니 여한이 없다.
(중략)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 조선연합치과의사회가 생긴 이래 여러 문제가 개정되었다. 우리의 의견과 조선총독부의 의견을 서로 맞추어 가면서 치과의사법의 범주 내에서 감독받아 가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연합치과의사회를 설립한 이래 그 보람이 생긴 것이다. 현재 니시카메(西龜) 총독부 위생과장 등은 치과의사회에 대한 이해가 많은 사람이다.
미쓰다 소오(滿田操) : 나중에 회무보고로 여러 사업 결과를 알리는 것보다 니시카메 위생과장이 특별히 총회에 참석하여 총독부의 방침이라든가 그밖에 모든 것을 얘기해 준다는 것은 지방회원으로서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중략)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 그리고 오늘날에는 의사회와 치과의사회를 관청에서 대등하게 취급하게 되었다. 부질없는 얘기 같지만 가령 천장절의 연회에도 지금과 같이 동장까지도 초청하는 일은 없었다. 그전에는 왜성대(총독부)에 초청될 때 의사회는 평의원까지 초청받고 있었지만, 치과의사는 인정하지 않았을뿐더러 초청하지도 않았을 때가 많았다.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한 당국자에게 치과의사회도 인정해 주기 바란다고 로비 활동을 벌여서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음부터는 치과의사회의 회장과 부회장을 의사회와 동등하게 초청케 되었다. 그 후 몇 년 정도 지나고 나서 이사 및 평의원도 초청하게 되었다. 총독부 기관에서 의사회를 참가시키는 경우 반드시 치과의사회도 함께 참가시켰다. 경성치과의사회, 한성치과의사회(한국인 단체), 조선연합치과의사회를 일반 의사회와 동등하게 대우하게 되었다. 일전에 총독부의 결핵예방협회가 탄생하여 그 평위원회 결성 때 치과의전 교장과 내가 초청받았다. 또 경기도 지부 결성 때는 경성치과의사회와 한성치과의사회, 조선연합치과의사회가 참가하게 되어 의사회와 대등한 대우를 받았었다. 그리고 이것은 하찮은 얘기지만 아직도 돼먹지 않은 것은 경성신사의 제전 때 의사회장, 약제사회장 등 둘은 동격으로 대우하면서 치과의사회는 동격으로 대우하지 않는 일이다.
▶다음호에 계속
권 훈 원장(광주 미래아동치과의원장)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조선대학교 치과병원 소아치과 수련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겸임교수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총동창회장
·대한치과의사협회사 편찬위원
·대한치과의사학회 정책이사
·대한소아치과학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