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미래를 보는 과거의 거울이다. 지나버린 과거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역사의 교훈을 가지는 과거는 미래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한치과의사협회(이하 치협) 창립 100주년 행사가 준비되는 과정을 보고 필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역사(history)의 어원인 히스토리아(historia)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가 되었고, ‘연구, 탐구’를 뜻한다. 즉 과거의 일이나 사람을 연구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나타나면 역사는 무엇이든지 변경이 가능하다.
현재의 치협 창립기념일인 1921년 10월 2일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첫째, 1981년 치협 대의원총회에서 기원을 1921년 조선치과의사회로 의결했기에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의결을 따라야 한다. 둘째, 긴 역사가 좋고 회원들에게 자긍심을 주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셋째,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치과의사단체이고 비록 적은 숫자이지만 조선인 치과의사(김연권, 이성모, 한동찬, 함석태, 조동흠, 박명진, 박부영)도 조선치과의사회에 임원 및 평의원으로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어 무방하다.
반면, 필자는 치협 기원이 될 단체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치협 기원에는 한국인의 철학과 가치가 담겨야 한다. 둘째, 진실된 한국 치의학의 역사가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셋째, 미래의 대한민국 치과의사에게도 자랑스러운 단체이어야 한다.
치협 기원은 역사의 단순한 사건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황, 전후사정을 감안해 접근해야 제대로 된 우리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1981년 대의원총회 이후 역사에 관심 있는 치과의사들이 치협 정립(正立)을 위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21년 창립된 조선치과의사회의 본모습이 많이 밝혀졌다[그림 1].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었음에도 치협 기원은 미동도 없다. 1921년 조선치과의사회를 치협 기원으로 하는 100주년 기념행사에 필자가 납부한 협회비가 사용된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 행사에 물 한 잔의 비용도 허락할 수 없다.
답답한 마음에 대한민국 보건의료단체 창립에 대해 조사해보았다[그림 2]. 1967년 9인의 자문위를 구성한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국내 최고의 의사학자인 김두종 박사의 고증 등으로 순수하게 한국인 의사로 1908년 구성된 ‘의사연구회’를 발굴하여 모체로 삼았다.
반면에 우리 치과계 현실은 어떠한가? 치과의사학(齒科醫史學)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이한수(1926-2013) 선생이 1973년 우리나라 치과의사 연대표에 기록으로 남긴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가 곧 현 대한칫과의사협회의 전신이라 볼 수 있다”라는 사료는 외면당하고 있다.
대한간호협회(이하 간협)는 1923년 4월 17명의 한국인 간호부와 약 2배 되는 서양인 간호부로 결성된 ‘조선간호부회’를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이 단체의 초대회장으로 한국 이름은 서서평(徐舒平)인 미국인 선교 간호부 Elizabeth Johanna Shepping(1880-1934)이 추대되었다. 그녀가 조선에서 22년간 선교활동을 하면서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면 간협 기원인 조선간호부회 초대회장 자격이 충분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조선간호부회는 1923년 4월 창립만 확인될 뿐 정확한 창립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도 비슷했다. 연도만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창립일은 알지 못한다. 조선인만으로 창립됐기에 일제강점기에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어찌됐든 한 단체는 간협의 기원이 됐고, 또 다른 단체는 치협의 기원으로 선택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아시아 주요국 치협의 창립연도와 초대회장을 알아보았다[그림 3]. 말레이시아와 우리나라만 초대회장의 국적이 자국민과 달랐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보면서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 창립 회원이었던 7분<함석태(咸錫泰), 안종서(安鐘書), 김용진(金溶瑨), 최영식(崔永植), 박준영(朴俊榮), 조동흠(趙東欽), 김연권(金然權)>에게 송구한 마음이다[그림 4].
마지막으로 1935년 9월 25일 경성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조선치과의사회 창립 1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조선치과의사회 15년 동안의 연혁을 보고하는 자료가 있어 소개한다.
조선연합치과의사회 연혁 개요 : 치과연구 Vol 23, No 5, 1988
조선에 있어서의 치과 의사(醫事) 위생의 개선 발달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1921년 10월 경성 나라자키 도오요오(楢崎東陽) 외 3인 발기로 되어 조선 각지에 분산 개업한 치과의사(개인)로써 결성하여 조선치과의사회를 창립함. 이래 매년 1회 추계에 조선 각지로부터 회원이 참집하여 경성에서 총회를 개최 치과의사 위생에 관한 제종의 문제를 협의하고 또한 매년 ‘회보’를 발행하여 회원 상호간의 연계기관으로 함.
1932년에 이르러 조선 각 지방에 치과의사회 설립을 보게 되고 점차 그 수효가 많아짐에 따라 종래의 치과의사 개인 단위로부터 나아가서 회 단위로 조직을 고쳐 동시에 조선연합치과의사회로 개칭함. 당시의 가맹치과의사회는 다음의 11개회이다. 경성, 인천, 원산, 평양, 대구, 함북, 황해, 부산, 여수, 군산 및 대전의 각 치과의사회였는데 1935년 봄 신의주, 전주, 목포, 함흥, 평남, 광주, 개성, 수원, 한성 치과의사회가 연달아 새로 가맹하여 이에 본 회는 현재 20개 가맹회를 보유하는 연합회로 되었다.
그간 회장 경질 4회로 현재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는 위생사상 보급운동으로서는 1934년 일본치과의사회 주창하에 내무, 문부양성 기타 후원으로 매년 6월 4일을 ‘충치 예방데이’로 제정하고 구강위생 사상 보급운동을 함에 따라 조선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본회 주창하에 각 가맹회와 협력해서 관계 관민 후원하에 전 조선에서 매년 속해하여 금년은 바로 제8회째임.
치협 기원에 대한 필자의 주장을 8회에 걸쳐 지면에 실어준 치과신문, 그리고 기고 요청을 받고 감동적인 글을 써주신 제주도에서 개원 중인 김호영 원장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또 기회가 닿는다면 치협 기원으로 삼아야 할 ‘한성치과의사회’의 발자취를 알릴 수 있도록 하겠다. 8회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독립운동가인 이상화(1901∼1943)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끝 두 연으로 필자의 마음을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권 훈 원장(광주 미래아동치과의원장)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조선대학교 치과병원 소아치과 수련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겸임교수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총동창회장
·대한치과의사협회사 편찬위원
·대한치과의사학회 정책이사
·대한소아치과학회 이사
※ 총 8회(객원기고 포함)에 걸쳐 소중한 기고를 보내주신 권훈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