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조선 치과계에서 최초로 치과 전문 잡지 ‘조선지치계(朝鮮之齒界)’가 발행되었다. 발행인은 이꾸다 싱호(生田信保)로, 그는 경성대학부속병원 치과의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행한 지 1년 만에 경영의 어려움으로 화장품 신문 회사를 운영 중인 다카하시 유키이치(高橋幸一)에게 인수되었고 잡지명은 ‘만선지치계(滿鮮之齒界)’라는 이름으로 1932년 재발간되어 1944년까지 존속하였다. ‘만선’에서 ‘滿’은 만주국(滿洲國), ‘鮮’은 조선(朝鮮)을 뜻한다. 만주국은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부를 차지한 뒤 1932년 세운 괴뢰국이다[그림1]. 따라서 만선지치계는 조선과 만주국에 있는 치과의사들에게 치과 정보를 제공하는 잡지였다.
1921년 10월 2일 조선에 있는 일본 치과의사들에 의해 설립된 조선치과의사회는 1932년 급조된 만주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안건을 처리하였다. 1932년 만주국에 개업권 요망의 건과 1939년 긴급동의 안건으로 만주 북지방면의 치과 개업에 관한 조사의 건이다. 1940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회고 좌담회에서 경성치과의학교 1회 졸업생 박준영은 “경성치과의학교를 졸업한 조선의 첫 번째 여성 치과의사 김름이(金凜伊)가 만주에 개업하고 있다”고 회고하였다. 한국 치의학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인 김름이 선생께서 만주까지 가서 치과를 개원하게 된 연유를 알려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 참 안타깝다. 부연하자면 일본이 청나라 마지막 자손인 푸이를 황제에 앉히고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목적은 간도에서 활동하는 조선 독립군을 제거할 목적도 있었다.
1945년 8월 조선이 해방되자 1946년 5월 1일 조선치계(朝鮮齒界)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첫 번째 치과전문지가 창간되었다. 발행인은 황영기, 편집장은 최효봉, 발행처는 조선치계사이다. 그런데 치과계 전문지 조선치계는 그 기원을 1930년 발행된 조선지치계로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인이 발행하고, 일본인 치과의사를 위하고, 일본인 치과 재료회사를 위한 잡지였기에 그들의 정신을 계승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30년 조선지치계 창간을 축하하는 광고는 1921년 창립된 조선치과의사회와 1912년 창립된 경성치과의사회만 있다. 조선인 치과의사들로 구성되어 1925년 창립된 한성치과의사회는 왜 치과계 잡지의 창간을 축하도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축하해 달라고 강압적으로 부탁한 것을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치협 기원으로 지정된 1921년 조선치과의사회가 얼마나 정통성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1930년 조선지치계 창간호에 제3대 조선치과의사회장인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의 축사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그림2]. “예전부터 치의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치과의업에는 국경이 있다. 우리 치과의업도 외국은 물론 조선과 일본(內地) 사이에 적용되는 법이 다르기에 불편한 점들이 참 많다. 현 상황에서 조선의 민도나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되나, 사회의 현실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불만스러운 점이 여러 가지 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으로써 국권피탈(國權被奪)된 상태였다. 그러나 조선치과의사회 회장인 도내가와는 조선과 본토인 일본의 국가적, 사회적 차이로 인해 야기된 문제점에 대한 불평을 창간호 잡지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단체를 현재 우리의 뿌리로 계속 삼아야 하나? 필자는 프랑스 과학자 파스퇴르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항변해 본다. “치과의사에게 국경은 없지만, 치과의사협회에는 국경이 있다! 조선치과의사회 회원에게 국경은 없지만, 대한치과의사협회에는 국격이 있다.”
필자는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해서 1921년 창립된 조선치과의사회의 진짜 모습이 3만 치과의사 회원들에게 드러나도록 노력하고 있다. 1935년 열렸던 회고좌담회 ‘조선치과의사회에 대하여’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1921년 조선치과의사회를 창립한 목적과 이유가 언급된다. 글로만 읽어도 분노가 치밀어 온다. 조선치과의사회 제4대 회장인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는 “조선(朝鮮)은 화태(樺太, 사할린)와 동격이다”고 하였다[그림3]. 그가 얼마나 조선을 업신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80여 년 전 강제 징용된 조선인 15만명의 후손 3만여명은 지금도 대한민국 국적도 없이 힘겨운 삶을 꾸려가고 있다. 이번 한가위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었다. “2021년에는 바르고 정의로운 치협 기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소원을 한 가지 더 추가해야겠다. 사할린 한인 동포들의 국적 회복을 회복하여 한국인으로 살아가게 해주세요.
1936년 7월 17일 조선치과의사회 창립 15주년 기념 좌담회 지면 중계 (지난호에 이어)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 (중략) 연합치과의사회가 지금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씨의 말처럼 일을 안 한다고 말하는데 요전에도 청진에서 온 회원이 나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해 준 적이 있다. 내 생각으로는 치과의사회가 돈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우리가 일본과 같이 된다면 하는 일도 없어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폐가 있지만, 오늘날 일본치과의사회는 건강보험 일이 그 중심이 되고 있으며 그밖에는 일다운 것이 없는 실정이다.
이것은 그런 것이 달성될 때까지 물적, 정신적으로 희생을 하면 그 목적을 향해 매진하는 일본인처럼 해내는 것이 연합치과의사회의 사명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기회 있을 때 말했지만, 1년쯤 지나도 그들은 별로 아는 것 같지 않았다.
이쿠다(生田信保) : 나는 치과의사회의 일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일단 유사시에는 대단히 그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 사명은 무한한 것이다. 결코 유한한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연합치과의사회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 대개 세상사는 목숨을 걸다시피 열중할 때는 하고자 하는 일을 달성하지 못한다. 수년 후에야 그 노력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때는 전에 노력했던 사람은 이미 물러나 있거나 죽은 후이다. 경성부성(서울시청)이 준공할 무렵에는 전에 노력했던 부윤(시장)은 전임하고 없었다. 그 후임자가 공적을 모두 인정받게 되었다.
소토게이조(外圭三) : 지금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씨의 말씀에 대해서인데…, 자기들이 일을 달성하고 나서 이를 감독하고 진행시키며 추진하는 것이 연합치과의사회의 사업이고 사소한 문제는 각 지방회에 일임할 것이다. 이제부터 더욱 연합치과의사회가 필요할 것이며 잡다한 일은 안 해도 좋다고 본다. 요는 잠자는 사자와 같은 존재로 필요한 것이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꾸다(生田信保) : 일본과 같이 통일되면 어떻게 되는가?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 아직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법규와 같게 되려면 근본적으로 참정권을 조선에 인정하여 조선에서 대의원(국회의원)을 선출, 총독부가 없어지고 일본 내무성에 직할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소토게이조(外圭三) : 그렇다. 그리되면 일본치과의사회와 통일하기 쉽게 된다. 그것은 제도상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으므로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 : 화태(樺太, 사할린)와 동격이 된다.
카와우치(河內) : 그것은 민족의 경우라든가 그밖에 문제가 있으니까.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 : 나는 조선에 있어서는 일본과 똑같이 하지 않아도 좁은 범위의 법역으로 조선에서 합리적으로 한다면 얼마라도 일본의 정신을 헤아려서 개량 발달시킬 수 있다고 본다. 현재 이를 진행 중이다. 굳이 일본같이 되지 않는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조선의 독자적 입장에서 진보시키면 그만이라 생각한다.
▶다음호에 계속
권 훈 원장(광주 미래아동치과의원장)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조선대학교 치과병원 소아치과 수련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겸임교수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총동창회장
·대한치과의사협회사 편찬위원
·대한치과의사학회 정책이사
·대한소아치과학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