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많이 아프거나 사는 게 매우 힘들어지면 변화를 원하게 된다.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함이 생긴다. 어쩌지 못하게 아프니 그제야 돌아보게 된다. 고난이 기회가 되고,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걸 체험하게 되었다. 아프지 않았다면 왜 아프게 되었는지 진지하게 돌아보지 못했을 것 같다.
명상과 마음공부는 필자에게 변화를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변화는 내 생각과 감정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들. 그 생각들에 반응한 감정들, 그리고 그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의 침전물인 무의식들이 내 안에서 어지럽게 드러나 세상과 반응하고 있었고 괴로움의 원인인 것 같았다. 그 반응에서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자유로워졌다.
3년 전 갑상선항진증 진단을 받았다. 증상이 심하여 일상생활과 진료가 힘들어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정도였다. 매일 아주 심한 몸살에 걸려 있는 상태와 비슷했다. 15년 전 개원 이후 내내 힘들어했던 병원 스트레스와 사기 비슷한 일로 1년 넘게 마음과 몸이 고생을 한 상태였다.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했지만 6개월 동안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매우 힘들었다. 진료받는 내분비내과 선생님은 세포 곳곳에 쌓여 있는 호르몬이 곧바로 줄지는 않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비교적 젊은 나이의 남성 갑상선항진증 환자는 완치율이 낮다고 하였다. 약을 평생 먹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몸과 마음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삶의 의미도, 재미도 없어졌다. 몸이 너무 힘드니 안 좋았던 식습관을 자연식 위주로 바꾸었고 식사량을 줄이고 밀가루를 끊었다. 40년 과민성대장증후군이 바로 사라졌다. 몸의 자세, 순환이 개선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용기 내어 평소에 관심은 있었지만 선뜻 경험해보지 못한 요가를 등록하고 바로 시작했다. 마사지, 반신욕으로 몸의 순환을 개선하려고 했다. 요가를 배우자 필자의 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몸의 에너지가 원활하게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골반이 전방으로 말려져 있고 둥근 어깨와 거북목이 개선되었다. 몸을 그동안 돌보지 않아 목과 등, 허리가 휘어 있어 순환이 잘되지 않았으니 몸에게 미안해졌다. 힐링 마사지로 복부의 장기들에 기구나 손으로 눌러주고 풀어주면서 많이 피로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세와 마사지로 풀어주니 훨씬 몸이 가벼워졌다. 감사한 시간이었다. 생활을 매우 단순화해서 어쩔 수 없는 만남만 가지고 다른 약속은 잡지 않았다. 10시 전에 취침했다. 몸만 생각했다. 상태는 기복이 있었지만 점점 좋아졌다.
요가를 배우면서 요가 수업 마지막에 에너지명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몸으로 느끼는 에너지의 감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몇 년 전에 주 1회 4시간, 6주 명상코스를 경험해 본적이 있었지만 그 뒤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갑상선약을 매일 4알씩 복용하고 건강을 챙기면서 상태는 호전되어 갔다. 육체의 건강한 느낌을 알게 되면서 건강하지 못한 상태를 민감하게 느끼게 되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몸의 긴장과 위축이 잘 느껴지면서 예전에는 인지하지 못하고 놓치던 몸의 신호를 알아차리게 되고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생활습관이 다시 나빠지려고 하면 바로 불편하게 느껴져 회복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몸 관리는 선순환되었다. 그런데 좀 나아지는 듯하다가 멈추었다. 힘든 마음은 그대로였다. 몸과 마음이 긴밀하여 서로 영향을 준다.
이렇게 몸의 생활습관은 바뀌었지만 필자의 감정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원망, 증오, 자기연민, 죄의식, 분노, 우울, 질투, 사소한 조바심, 미묘한 초조함 등 고통스런 감정들이 되풀이됐다. 끝없이 닥치는 문제들, 선택의 순간에 손해 볼까 봐 걱정하고 불편한 상황은 회피하며 다른 즉각적 즐거움으로 보상하는 충동적 행동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한 감정습관이 몸의 증상으로 자주 드러났다. 아니 잘 느껴졌다. 목과 어깨가 경직되고, 복부가 뭉치고, 가슴이 막히는 감각을 이전보다 잘 느꼈다. 머리로 열이 올라오고 두통도 다시 생기고 손, 발, 배가 차가워졌다. 몸의 각 부위의 통증과 감기를 달고 살던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감정습관의 변화를 위해 마음공부와 명상을 했다. 명상을 집 근처에서 배웠다. 관련 유튜브도 보고, 마음이 가거나 우연히 알게 된 서적들을 매일 읽었다. 책들에서는 생각과 감정이 내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이미 완전하다고 했다. 불교철학(불교신자는 아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닌 삶의 방법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에 관심이 있어 이전에 가끔씩 읽어 보았었다. 그러다 지인의 추천으로 평소 좋아하는 법륜스님이 이끄는 정토회 불교대학에 다니게 됐다. 스님의 법문은 종교 초월적이다. 그곳에서도 5분 정 도 짧게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불교대학에 모인 분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은 서로에게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집 앞 도서관에서 독서토론모임에 등록하였다. 그동안 필자의 독서 편식을 해결하고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지만 미루었던 경험을 하고 싶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주로 인문학과 문학이었다)이 선정되었다. 타인의 다양한 견해가 나의 틀을 깨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게 된 유명한 서구 영적지도자들의 영성 책들에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다양한 인류의 스승들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마음 공부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깊이 공감하며 가슴으 로 이해할 때 몸으로 느끼는 명상이 단단해진다.
호흡명상은 단순하지만 어려웠다. 호흡을 느끼면서 생각을 멈추거나 그저 바라만 보라는데 생각이 제멋대로 일어나서 통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미친 원숭이 같았다. 내 생각을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함마저 느꼈다. 이는 시간이 지나고 반복하여 익숙해지면서 차츰 나아졌다. 내 마음을 관찰하는 관찰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관찰은 생각의 차원이 아니다. 느낌에 가깝다. 몸의 감각 차원으로 이해하는 게 낫다. 머리로 하다가는 관찰이 아니라 예전처럼 평론가, 심판관이 되기 쉽다.
타인이나 상황에 관심을 가지듯이 스스로의 반응 자체에 관심을 가지며 관찰한다. 관찰하면서 판단하거나 분석하지 않아야 한다. 토를 달면 안 된다. 그저 바라만 보며 의식을 호흡이나 감각으로 몸에 뿌리 내리는 게 좋다. 생각을 지켜보고, 감정을 느끼고, 반응을 관찰한다. 반응들은 관찰만으로도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 변화된 경험은 운전하면서 적용해 보았다. 운전하다가 욱하던 습관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효과가 매우 빨랐다.
마음공부와 명상을 하면서 조금 묘한 체험이 있었다.
1) 9시쯤 잠자리에 들면 새벽 3~4시 사이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이전에는 늦게 잠들어서 늦게 일어나게 되어 일어날 때 항상 힘들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명상을 하려고 앉았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고 나지막하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서너 번 말을 하게 되었다. 이상하고 민망했지만 신기했다. 진심으로 나오는 말이었다. 무언가 부족함 없이 충만하고 평화로움 안에 있는 감사함 그 자체였다. 어떤 조건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몸이 아픈 상태이고 단지 일찍 자고 일어났을 뿐이었다. 해도 뜨기 전 이른 새벽에 느껴지는 원인 모를 감사였다. 대상이 없는 순수한 감사였다. 한 달 정도 반복되었고 생생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2) 명상을 배우던 중 죽음명상을 체험해 보았다. 본인 스스로 임종의 순간을 생생하게 그려보고 느낌으로 상상해 보는 가상 체험명상이다.
차분하게 몸의 긴장 없이 누워 천천히 이완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면서 가보는 것이다. 최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떠오르는 대로, 되도록 만들지 않고 따라간다. 장소, 분위기, 냄새 등의 감각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숲속의 집에 누워있었다. 장소는 맘에 들었다. 그곳에 아내와 자식들이 흐느끼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았다. 동시에 자신에 대한 연민이 일었고 ‘너 참 수고했다’라고 필자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눈물이 흘렀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마지막 순간에 중요한 것들이 정리되었다.
죽음명상은 현재 필자가 신경 쓰고 집중하는 것들을 사소하게 만들었다. 그저 미루고 당연시하던 것이 중요했다. 얼마나 사랑을 주고 함께 나누었는지가 다였다. 죽음명상은 지금 내가 무엇을 진정 원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리고 눈앞의 이들에 휩싸여 버리지만 가끔씩 떠올려 보며 마음을 다잡 는 계기가 되고 자극이 된다.
경험으로 보면 나의 하루 중 오만가지(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하루 평균 오만번의 생각이 측정됨) 생각의 90% 이상이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하면서 쓸데없이 후회를 하거나 미래 걱정의 반복이다. 10% 이하만이 필요한 생각들 같다. 5% 미만일 수도 있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자율주행하고 있는 생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생각이 없어지면 위험해지거나 멍청해 보이거나 실수할 것만 같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적절한 생각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바로 이루어지는 생각들이다. 감정개입이 적고, 담백하고, 힘 있는 생각들이 우리에게 유용한 도구로서의 생각이다. 가끔씩 매우 적절한 행동을 할 때 생각이 없는 상태, 무아지경에서 행동하게 되는 경험이 있다. 몰입이다. 몰입할 때 생각이 없는 무심의 상태다. 무언가에 내맡겨진 듯한, 시간도 멈춰버린 듯한 상태. 그래서 상쾌한 느낌이다.
생각의 포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첫 번째 시도는 ‘내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 자유로워진다. 알아차리기 전보다 생각의 영향력이 떨어진다. 잘 알아차리려면 명상으로 단련된 이완된 집중의 힘이 필요하다. 자유란 이런 의미에서 보면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다. 생각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을까? 주의할 점은 멍때리기는 생각과 주의 집중까지도 사라진 상태다. 생각만 사라지고 우리의 주의, 의식은 선명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후회, 걱정, 기대가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의 기쁨, 수용, 자유, 평화가 남는다. 생각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세워두고 좇는다. 거기서 생기는 괴리감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렇게 과거에 만들어 쌓아둔 고통과 지금 만들고 있는 고통이 생긴다. 우리는 고통과 통증을 구분해야 한다.
생각은 갈망하거나 혐오하거나 무관심 중 하나로 분별하면서 반응한다. 갈망은 불건전한 욕망, 이름 그대로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은 일시적으로 성장 동기처럼 보이지만 뒤에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은 만족을 모르는 끝이 없는 욕구의 연속이다.
목표를 이루면 아주 잠시 만족했다가 익숙해지면 따분하고 공허해한다. 그럼 다른 욕망으로 바로 갈아탄다. 그러면 늘 현재를 불만족스럽게 만든다. 더 큰 쾌락을 갈망하게 된다(그 근간에는 내가 사랑받지 못할 거란, 내가 부족한 사람이란 믿음이 있다. 두려움이 깔려 있다). 이것은 패턴이 되고 반응공식이 되어 현재를 생생하게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불건전한 욕망은 쾌락, 욕심, 탐욕, 불만족 등이고 건전한 욕망은 사랑, 자비, 연민, 창조성, 지혜 등에서 기인한다. 유쾌한 경험을 즐기는 것은 좋은 것이다. 다만 욕망이 그 쾌락을 움켜쥐고 ‘좀 더’를 원할 때 문제가 된다. 갈망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들에 솔직해지고 용감하게 인정해야 한다. 풍요롭고 즐거운 것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욕망이다. 하지만 그것에 휘둘릴 때, 더 큰 자극을 원할 때, 두려움에서 기인한 비교우위를 위한 목적일 때 주인 자릴 내주게 되고 끝없이 목마른 아귀가 된다.
자신이 가진 것은 좋아하지 않고, 못 가진 것만 원한다. 이것을 완전히 뒤집어 가진 것을 원하고, 못 가진 것은 원하지 않아 본다면 어떨까? 그렇게 못 가진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무기력해지지 않을지, 낙오하지 않을지, 기대와 욕망 없이 어떻게 행동할지 의문이 들고, 욕망은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집착과 열정을 혼동해서 생기는 오해다. 건전한 욕망인 열정에는 결과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없다. 현재를 감사하고 있으며 과정이 이미 보상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기다릴 뿐이고 선물이다.
집착이 동기인 갈망으로 행동하면 당장은 성장 동력으로 보이지만 그 과정이 효율적이지 않다. 불필요한 감정 에너지의 소비가 생긴다. 그 뒤에 부작용이 따른다. 부작용이란 짧은 만족후에 찾아오는 끝없는 불만이고 행복을 유보하는 불만족이다. 반면 부작용 없음은 지금 당장 이 순간의 기쁨이다. 갈망이 아닌 건전한 욕망으로 행동하면 부작용이 적다. 집착 없이 하되 최선을 다해 몰입해서 열정적으로 행위한다. 그러면 걱정, 기대, 불안의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 없이 최대 효율로 행동하게 된다. 행동하기 전에 내가 어떤 존재, 마음상태로 하는지가 중요하다. 혐오와 무관심도 마찬가지 부작용을 낳는다.
어떠한 불운이 어떻게 다른 행운의 씨앗으로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새옹지마다. 우리 모두 인생에서 그런 경험들이 많다. 나쁜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게 된다. 우리의 시각, 인식은 제한적이고 근시안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그 최종결과를 앞서 판단할 수 없다.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판단을 유보해본다. 이렇게 하려면 습관적으로 순식간에 이뤄지는 판단, 분별반응에서 잠깐의 간격이 생겨야 가능하다. 우리는 보통 심호흡을 해본다든지, 잠깐 시간을 가지면서 시도를 해왔다. 시원치 않았다. 생각의 포로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으로 생 각을 비우려는 것은 경찰서장이 불을 질러놓고 방화범을 잡는 꼴이다. 생각이 아닌 몸의 느낌에 집중, 유지하며 반응 없이 머물러 본다. 생각이 일어나도 바라볼 수 있으면 좋다. 그러다 생각은 더 잠잠해질 것이다.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삶을 있는 그대로 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명상이다. 명상은 우선 몸을 이용해 고요히 주의력을 안정시켜 생각을 그대로 알아차리는 과정과 같다. 생각으로 고요히 하려고 하면 다시 생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우선 몸으로 내 의식을 돌려야 한다. 호흡만을 가만히 느껴보거나 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왜곡 없이 오롯이 느껴본다. 더 깊어지면 몸의 감각도 사라지고 깊은 평화로움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우리가 원하는 바른 것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깃들어 있다. 단지 헛된 것을 하지 않으면 된다. 사랑으로 존재할 것인가, 두려움으로 존재할 것인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온몸으로 느껴보자. 그리고 행동한다. 그 행위 안에 우리의 존재 목적이 녹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