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댄스홀에 춤을 추러 온 이들이 가득하다.
그림은 굵은 윤곽선을 강조해 화면을 구분한 후 안에 색을 담아 평면적인 느낌이 든다. 고갱과 그의 친구들은 인상파들이 눈에 보이는 순간의 빛을 표현하려 보이는 대상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윤곽선을 먼저 그리고 구분된 넓은 면에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를 그려 넣는 방식을 이용했다. 이를 중세 시대 칠보 공예의 기법 클루아조네(Cloisonné) 에서 이름을 가져와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e)이라 불렀다. <아를의 댄스홀>은 클로아조니즘이 표현된 작품이지만 고흐가 그린 작품이다.
그는 왜 자신이 그리던 방식이 아닌 고갱이 그리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그에게 건넸던 것일까?

노란 집
1888년 2월 고흐는 파리를 떠나기로 한다. 그가 왜 아를이라는 도시를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일본 판화에서 보았던 더 밝은색과 푸른 하늘을 찾고 싶어 했고, 파리의 긴 겨울과 동료 화가들 간의 성공을 위한 반목과 갈등에 실망감을 토로하고는 했다. 그에게 아를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회의 땅이었다.
적응을 위한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오자, 그는 아를의 이곳저곳을 찾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5월이 되자 고흐는 머물던 호텔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만의 작업실을 찾는다. 그가 찾은 노란 집은 꿈속의 집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랜 기간 누구에게도 임대되지 않아 건물 벽의 노란 페인트가 떨어진 낡고 허름한 집이었다. 그러나 고흐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저렴한 월세에, 네 개의 방을 침실과 작업실로 나누어 쓰면 자신이 꿈꾸던 화가 공동체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이라 생각했다.
여기에서는 숨 쉬고 명상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푹 빠져 동생 테오의 의견을 듣기도 전에 계약을 마무리하고, 처음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집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창문과 문을 수리한 후 건물 외벽은 신선한 버터 색으로, 문은 초록색으로 칠한다. 한곳에 자리 잡지 못하고 떠돌던 그에게 노란 집은 천국 그 자체였다.
어느 정도 정리된 5월 말, 마침내 고흐는 자신이 꿈꾸던 화가 공동체를 위해 폴 고갱에게 아를로 초대하는 편지를 보낸다. 자신이 아를에 방 네 개짜리 집을 빌렸으며 남부에서 작업할 마음이 있다면 내려오라 전한다. 고갱도 잘 알고 있는 화상, 고흐의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보조금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고 테오에게 한 달에 한 점씩 그림만 보내면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고흐의 기대와는 다르게 고갱은 건강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둥 돈이 부족하다는 둥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확답을 피한다.
그동안 고흐는 아를의 여름을 그렸고 고갱이 올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작업실을 온통 해바라기로 그리는 것은 어떨지 상상을 펼치다, 자신만의 공간이 아니니 그럴 수는 없다며 벽화가 아닌 캔버스에 해바라기를 여러 점 그린다.
고갱을 기다리는 고흐의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리고 5년 같은 다섯 달이 지나 10월 초 드디어 고갱이 아를로 가겠다는 소식을 전한다. 고흐는 기쁨에 들떠 집 밖 공원 풍경을 그린 그림 〈연인과 푸른 전나무가 있는 공원: 시인의 정원 III〉과 여름에 완성한 〈해바라기〉를 함께 고갱 침실에 걸어둔다.

두 화가
1888년 10월 23일, 고흐는 문을 열고 들어온 고갱의 모습에 당황한다. 그는 지난 몇 달간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아를에 오지 않았지만, 눈앞의 고갱은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가 도착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테오가 고갱의 〈브르타뉴의 소녀들〉을 꽤 비싼 가격에 팔았다는 소식과 함께 500프랑을 우편환으로 보내왔다. 고흐는 평생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었다. 고흐는 고갱을 동경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비교가 되어 자꾸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고갱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리가 되었다던 노란 집의 작업실은 무엇 하나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개를 닫지 않고 던져 놓은 튜브 물감들과 피우다 버린 파이프 담배까지, 작업실에는 혼돈만이 가득했다.
서로의 첫인상은 기대와 달랐지만, 둘은 곧 함께 작업을 시작한다. 고흐는 그가 좋아한 밀레의 작품처럼 드넓은 들판에 씨 뿌리는 농부를 그렸고, 자신의 작품도 언젠가 빛을 볼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고갱은 들판이 아닌 레 알리스캉(Les Alyscamps)이라 불리는 고대 로마 유적지로 그림을 그리러 나섰다. 고흐는 아를에 온 지 7개월이 지나도록 한 번도 레 알리스캉을 그린 적이 없었다. 그곳은 관광객이 많아 고흐는 일부러 피해 다니던 곳이었다.
그뿐 아니라 고갱은 행동 또한 거침이 없었다. 고갱은 아를에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고흐가 자주 가던 카페 주인 마리 지누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를 노란 집으로 데려온다.

사실 고흐도 오랫동안 그녀를 마음에 두었고 그녀를 그리고 싶어 했지만, 거절이 두려웠는지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고흐는 아를에서 모델을 구하지 못해 늘 힘들었고, 아를 전통 복장을 하고 포즈를 취하기로 한 여인에게 돈까지 줬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는 곤란한 일도 겪었다.
지누 부인은 노란 집에 들어와 고갱과 마주 앉아 그를 ‘폴 선생님’ 이라 부르며 포즈를 취한다. 하지만 옆에 앉은 고흐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고흐는 고갱과 그녀의 옆에 앉아 허겁지겁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린다.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고갱이 간단한 스케치를 하는 사이, 고흐는 그녀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섞인 마음으로 유화를 완성한다.


고흐가 그린 부인의 초상화에는 우산과 장갑이 놓여 있고, 부드러운 미소와 여인의 고결함이 느껴진다. 반면 고갱이 그린 부인의 미소는 좀 더 가볍고 마치 추파를 던지는 듯하다. 또 그녀의 뒤로는 고흐의 지인들과 술에 취한 이들이 탁자 위에 곯아떨어져 있다. 두 화가가 한 여인을 두고 함께 그렸지만, 같은 공간, 같은 상황에서도 많은 것이 달랐다.
물과 기름
고흐는 고갱을 좋아했고 동경하기도 했다. ‘상상만으로 그림을 그려 보라’는 고갱의 조언을 받아들여 고흐는 자신의 방식과 고갱의 방식을 조합한 포도밭의 수확 장면을 그린다(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이 고흐 살아생전 유일하게 판매된 작품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둘의 관계는 갈등이 심해지고 다툼이 잦아진다.
고갱은 고흐가 바라본 빛과 색채는 물론 아를을 무시하는 말을 쏟아낸다. 브르타뉴가 프로방스보다 훨씬 훌륭하고, 아를보다 퐁타벤이 진정한 화가의 천국이며 심지어 아를은 남부에서 가장 지저분한 곳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한다.
고흐는 야외에서 바라본 세상을 유화로 그리려 했고 고갱은 간단한 스케치 후 실내에서 자신이 본 세상을 돌아보고 섬세하게, 천천히 작업에 옮기는 방식을 더 좋아했다. 고갱은 즉흥적인 고흐의 작업 방식에 동의하지 못했고, 고흐가 화가 공동체의 꿈에 부풀어 칠한 노란색에 대해서도 돌아보면 모조리 온통 노란색이라며 욕설과 함께 경멸이 가득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게다가 존경하는 선배 화가를 두고도 언쟁한다. 고흐는 바르비종파의 샤를-프랑수아 도비니와 테오도르 루소를 존경했지만, 고갱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와 라파엘로 산치오가 더 훌륭하다며 부딪친다. 둘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고흐는 고갱의 조언을 무시하고 다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고갱의 작업에 간섭한다. 여기에 더해 정리 정돈을 잘 하지 않는 고흐의 생활 습관까지 다툼의 원인이 되며 둘은 모든 것에 사사건건 논쟁하며 조롱 섞인 말을 건넨다.
고갱은 고흐에 대한 감정을 담아 초상화 한 점을 그리는데, 그것이 바로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다. 해바라기와 노란색이 가득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표정은 우울하다 못해 원숭이 같은 생김새로 그려져 있다.
그림을 본 고흐는 분노했고, 고갱 또한 테오에게 아를을 떠나야겠다고 편지를 보낸다.
고흐가 그린 고갱의 그림
고흐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었기에 그에게도 고갱과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꿈꾸던 화가 공동체와 고갱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고갱에게 매달린다. ‘퐁타벤에서 그렸던 그림보다 아를에서 그린 작품이 훨씬 좋다’, ‘떠난다면 돈이 더 많이 들 것이다’라며 갖은 말로 설득하지만, 고갱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고흐는 마지막 심정으로 고갱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하나의 그림<아를의 댄스홀>로 대신한다.
일반적으로 후배 화가는 존경하는 선배의 그림을 보고 연습하며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간다. 고흐와 고갱 둘은 모두 정식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화가였다.
고흐는 고갱을 자신이 보고 배워야 할 선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고흐는 고갱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 그를 기다렸고, 이제 아를에서 함께한 지 두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고흐는 붓을 꺼내 고갱의 그림을 그렸다.
자신이 원하던 방식이 아닌 고갱이 조언했던 방식의 그림, 고갱을 존경하는 그림을 그린 것은 자신을 내려두겠다는 뜻이었을까? 고흐가 고갱과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통했을까, 둘은 잠시 화를 가라앉히고 한 걸음 물러나 남프랑스의 파브르 미술관이 있는 몽펠리에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온 며칠 후 고갱은 아를을 떠나겠다는 계획을 철회한다.

하지만 아를을 떠난 두 남자
날씨가 좋지 않았던 12월 23일, 격렬한 말다툼 후 고갱은 집을 나와 공원을 지나고 있었다. 곧 고흐가 쫓아와 떠날 것인지 물었고 그럴 것이라고 답한다.
고흐는 집으로 돌아와 자기 귀를 잘라냈고, 잘린 귀를 신문지에 싸서는 고갱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다 고갱이 좋아하던 여인이 일하는 곳으로 가, 문을 지키고 있는 남성에게 그녀에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메시지와 귀가 담긴 보따리를 건넨다.
사실 둘 사이에 변한 것은 없었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더 잘 이해해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고갱은 잠시 출발을 연기했을 뿐이었다.
테오의 결혼 소식을 들은 고흐는 홀로 된다는 불안감에 잠식된다. 그는 고갱이 아를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다가 함께 전시회를 기획하자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말하더니 갑자기 비난을 쏟아내고는 했다. 그러다 한밤중에 고갱이 떠날까 두려워 방문 앞을 서성였다. 고흐의 정신적 불안감은 잦은 환각 증상을 보였고, 그를 점점 망상으로 끌고 갔다.
결국 다시 둘은 멀어져갔고, 고흐가 저지른 일대의 사건을 뒤로 하고 고갱은 아를을 영원히 떠난다.

고흐는 퇴원 후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후 몇 번의 발작 증상이 찾아왔고, 아를 주민들의 적대적 시선을 이겨낼 힘도 없었다. 그들은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만 해가 바뀐 1월, 고갱은 고흐에게 해바라기 그림에 대한 찬사와 함께 자신에게도 해바라기를 그려줄 수 있는지를 묻는 편지를 보낸다. 고흐는 고갱의 요청을 여전한 희망으로 생각했고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고흐의 정신 상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희망의 상징이었던 해바라기는 고갱에게 가지 못한 채, 5월이 되자 고흐는 노란 집을 청산하고 생폴 드 모졸 요양원으로 향한다. 고갱 또한 인간의 순수함이 남아있다고 생각한 저 멀고도 먼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난다.
어디서는 착한 고흐, 나쁜 고갱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관계를 통해 성장한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때로는 불편한 관계를 통해서도 우리는 성장한다.
고흐와 고갱이 그러했을 것이다. 서로 같은 생각으로 함께 지내려 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시작부터 둘은 어긋나 있었다. 하지만 고흐는 자신의 방식을 내려두고 화해의 그림 <아를의 댄스홀>을 그렸고 고갱은 고흐의 상징과 같은 <해바라기>를 그려달라 했다. 둘은 서로를 시간이 흐른 뒤 완전히 인정했고 더 나은 예술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