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될 수만 있다면 과장된 공약을 남발해도 괜찮다. 유권자는 공약에 박수를 보낼 뿐, 얼마나 지켰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 정치 현실을 꼬집는 듯하지만, 사실은 프랑스 심리학자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이 1895년 출간한 ‘군중심리’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흑색선전으로 상대를 공격하되, 증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그의 분석은 13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군중심리란 많은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할 때, 고립되거나 비난받지 않으려 동조하는 심리를 말한다. 소셜 네트워크 등에서 어떤 여론이 만들어지면 거기에 반대하지 않으려는 것, 신호등이 빨간불이어도 한 명이 무단횡단하면 줄줄이 건너는 것, 커피숍에서 일행 모두가 아메리카노를 시키면 원래는 라떼가 먹고 싶어도 따라가는 것 등이 그렇다.
르 봉은 프랑스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군의관으로 보불전쟁에 참전했다. 그 과정에서 ‘9월 대학살’과 같은 비이성적인 집단행동을 목격하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집필한 ‘군중심리’는 학술논문이 아닌 에세이 형식이었고, 처칠·레닌·스탈린 그리고 드골 같은 각국의 정치 지도자와 각계 인사들이 애독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군중에 관한 연구서 중에서 이 책이 돋보인 이유는 군중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논의했기 때문이다.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을 직접 경험한 그는 군중을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원리를 제시했다. 당시 파시즘을 앞세운 독재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다른 사상가들이 “군중은 이래서 나쁘고 저래서 나쁘므로 한마디로 통제 불능”이라고 했다면, 르 봉은 “군중은 나쁘지만, 권력자들이 잘 활용할 여지가 있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르 봉은 군중의 힘에 주목했다. 그가 말하는 군중은 단순히 같은 장소에 모인 무리가 아닌 특정 감정이나 신념에 의해 결집된 집단이다. 이 속의 개인은 ‘나’라는 감각을 잃고,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난 채 충동적으로 사고하며,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지식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군중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르 봉에 따르면 군중 속의 개인은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과 관념 속에서 ‘나’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잃고 군중만으로 남게 된다고 했다. 익명성에 기대어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빨간불에도 무단횡단을 하며, 잘못된 줄 알면서도 눈치 보며 동조하게 된다. 르 봉은 이를 ‘군중에 침잠(submergence)한다’고 표현했다. 군중에 침잠한 개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통제력, 고차원적인 이성, 규범, 현실 인식을 상실하고 그때그때 충동과 감정, 욕구에 모든 것을 내맡기게 돼 자기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그것을 일체 생략한 채 ‘난리 부르스’를 친다는 것이다.
르 봉은 이 상황을 전염(contagion)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럴 때 군중은 다른 사람의 영향력에 크게 취약해진다고 했다. 간단한 말 한마디, 분노를 일으키는 상황, 자극적인 사건과 주변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로 인해 개인이 의도치 않게 휩쓸리게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르 봉은 이를 암시(suggestion)라고 불렀는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 세계적으로 파시즘과 같은 역사를 살펴볼 때 상당히 정확한 설명이다.
중국 고사에 삼인성호(三人成虎), 즉 ‘세 사람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근거 없는 말도 여럿이 맞장구치면 사실처럼 둔갑한다는 뜻이다. 그럴듯한 소문, 어처구니 없는 음모론에 요동치는 여론과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금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