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란 사전적으로 ‘행복하지 않음’이다. 즉 행복이 기준이다. 그럼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이처럼 행복은 충분한 만족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욕심이 무한하여 충분한 만족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행복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에 따라 좀 더 많고 높은 것을 요구하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며 미래적이다. 반면 불행은 현실이다. 누군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생각이 필요하지만, 불행하냐고 물어보면 바로 답변이 나온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행복하지 않음’은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행의 반대는 욕망을 기반으로 한 추상적인 행복이 아니고 현실을 기반으로 한 ‘불행하지 않음’이다. 행복은 이루기 어렵지만, 불행을 전제로 한 ‘불행하지 않음’은 이루기 쉽다.
과거 후진국이나 개도국 때는 물자와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좋고 나쁨이 아니라 구하기 어려웠다. 반면 지금은 물자와 먹을 것의 절대량이 넘친다. 과거에는 없어서 불행했다면 지금은 더 좋은 것을 소유하지 못해 불행하다. 이런 상황에서 ‘불행하지 않음’은 조금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
요즘 대다수 무주택자들이 급등한 집값과 전세로 인해 대출하고 수입의 일정액(이자)을 은행에 주어야 한다. 합법적인 절차에 따른 것이지만, 똑같은 집에 사는데 과거에 비해 전세가가 급등해 전세를 얻기 위해서는 대출을 해야만 하고 월세 40만원을 더 주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수탈이다. 조선시대에는 군포와 공납으로 강제로 수탈당했다면, 지금은 빚으로 은행에 수탈당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백골징포, 황구첨정이 있었다면, 지금은 전세금 대출과 신용대출, 월세가 있다. 과거에는 양반이 예외였다면, 지금은 집 있는 자가 예외이다. 과거에는 고을 수령과 아전이 주체였다면 지금은 은행과 분수 넘는 대출이 주체이다.
대출로 영끌하지 않았다면 집값이 오를 이유가 없었다. 원천적으로 대출해 주지 않았다면 집값과 전세값이 오를 이유가 없었다. 집값과 전세가 오른 원천적인 이유는 개개인들의 작은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욕심을 이용한 자본 세력이 만든 대출의 덫이다. 자본 세력은 분수 넘은 더 많은 대출받을 상황을 만들고 유도하여 서민들이 수입의 한 부분을 이자로 지출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몰아넣었다. 신혼부부가 5억이 넘는 전세비용을 구할 수 없어서 결혼을 포기하는 현실은 조선시대에 가난하여 결혼하지 못하는 처녀 총각에게 조정에서 돈을 주어 결혼시키던 시절과 다르지 않다.
결국 조선시대에 군포와 공납으로 수탈당하던 서민들의 삶이 지금은 대출이자와 빚으로 이름만 바뀌어 똑같이 수탈당하고 있다. 과거에는 수탈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다면 지금은 대출받지 않으려고 원거리로 이사를 간다. 과거에 피할 수 없었던 수탈이나 지금 빚에서 벗어나기 힘든 현실이나 다르지 않다. 과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분에 따라 어쩔 수 없었다면 지금은 부모 자산에 따라 정해지는 것도 유사하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 것은 오로지 욕심을 최대한 줄이고 분수를 낮추면 최소한 빚을 피할 수는 있다. 짧은 행복을 위해 대출받아 아파트를 유지하느니 힘들지만 작은 아파트로 줄이면 빚 없이 ‘불행하지 않음’으로 살 수는 있다. 줄이면 달라질 수 있다.
분수(分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우선 지분(知分)이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다. 그 다음은 수분(守分)이다. 무리하지 않고 분수를 지키는 것이다. 마지막은 안분(安分)이다. 지켜온 분수 속에서 편안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분수를 알고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조선시대 수탈을 피하기 위해 화전민이 되었듯이 지금은 빚을 피해 분수인이 되면 같이 잘살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 너만 잘살라는 자본 세력에 속은 영끌이 집값을 올렸고 결국 자신들은 빚으로 수탈당하고 있다. 오른 집값은 다시 새로운 수탈을 창출했다.
지금의 자신을 돌아봐 불행하지 않다면 진정한 행복이다. 빚을 놓고 분수를 잡는 것이 「불행하지 않음」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