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1회 글을 쓰니 처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다. 지속적으로 하는 일에 숫자의 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시작과 끝이라는 인간적 관념의 가치를 부여해본다.
100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도에서 시작한 10진법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인간의 손가락 개수가 10개라서 10진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이외에도 인간은 많은 진법을 사용한다. 달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에는 12진법을 사용한다.
12진법은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연필 한 다스라는 다스를 사용하였다. 다스는 하루를 나타내는 시간의 단위로, 하루는 2다스의 시간으로, 1시간은 5다스의 분으로, 1분은 5다스의 초로 나타내었다. 또 길이로 12인치, 무게로 12온스를 사용하고 음악에도 마디나 음을 반이 아니라 3등분 할 때의 개념이 12진법이다. 그래서 2박자, 3박자, 4박자, 6박자는 전부 12의 약수이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컴퓨터의 키보드의 맨 위에 위치한 키는 F1에서 F12까지 12개의 키도 12를 좋아하는 유럽인들 때문에 탄생된 것이다. 초와 분은 60진법을 사용하며, 이는 지구의 공전주기와 원의 360도의 1/6에 해당된다.
이에 동양의 역서인 만세력은 60갑자를 주기로 하였다. 60갑자는 10간(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과 12지(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를 조합하여 만든 것으로 10과 12의 최소공배수가 60인 것을 이용하였다. 즉 10진법과 12진법을 결합하여 60진법으로 60갑자를 만들었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수명의 한 턴을 60년으로 보았던 것이기도 하다. 일주일을 기준으로하면 7진법을 사용한다. 또 주역에서는 8진법을 사용하여 64괘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본질인 생과 사를 이용한 진법은 이진법이며, 가장 오래되었다. 동양에서는 음양으로, 서양에서는 0과 1로 표현하였고, 현대과학의 핵심인 컴퓨터의 근간을 이루게 하였다.
진법의 특성이라 한다면 수가 끝나면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 시작은 끝에 도달하고 끝은 다시 시작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이를 야누스라고도 하였다. 파괴의 신인 동시에 창조의 신이기도 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주역의 64괘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철학에서는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설명하였다. 논어에서는 유시유종(有始有終:시작도 있고 끝도 있다)이라고 했다. 정확한 의미는 ‘시작과 끝이 있는 사람은 성인뿐’이라 하여 일반인들이 대충 시작하고 적당히 마무리 짓거나 끝이 없는 경우에 경각심을 준 것이다. 더불어 그 시작이 좋아야 끝이 좋을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논어 자장편에 나오는 ‘유시유졸자 기유성인호(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ㆍ잘 시작하고 잘 마치는 사람은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다)’의 의미가 잘 표현해주고 있다. 불교에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한다. 원형처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이다. 인이 연으로 나타난 결과이고 그 결과가 인이 되어 다시 연이 나타난다는 인연법이며 윤회인 것이다. 그래서 무시무종이지만 결국 원의 한 점을 선택하면 유시유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사는 늘 한 사건, 한 사람 등에 마음이 집착하기 때문에 무시무종이 되지 못하고 유시유종의 윤회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짧게 보면 유시유종이고 길게 보면 무시무종이다. 결국 유시유종과 무시무종이 같은 것이다.
이 모든 진법에 전제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방향성이다. 뒤로, 역으로, 거꾸로 흐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원리의 근원은 시간성이며 생명성이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고 생명을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진법은 반드시 정 방향으로 흘러야한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방향(正)으로 돌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시유종의 가장 큰 의미를 옳음(正)에 둔 것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결코 시작이 나쁘면 끝만 좋을 수 없음이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쓸 수 없고 ‘짐승’처럼 쓸 수밖에 없는 것이 유시유종의 진정한 의미이다.
201회를 시작하며 시작의 의미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