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소년과 관련된 대형사건 두 가지가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안산 의붓딸 살해사건’과 ‘김군 터키 실종사건’이다. 얼핏 생각하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두 사건 모두 청소년이 개입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사건에서는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16세의 소녀가 있었고 다른 한 사건은 스스로 삶을 개척하기 위하여 집을 떠난 18세의 소년이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엄마가 이혼 후에 새로 선택한 의붓아버지가 아주 극악하여 성폭행을 당하다 급기야는 살해된 일이다. 아주 착하고 여린 아이여서 저항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사건은 교우 관계 때문에 중학교를 그만둔 뒤 집에서 혼자 검정고시를 준비하다가 인터넷과 비밀 SNS로 대화하던 터키의 펜팔 친구를 따라 떠난 18세의 은둔형 아이였다. 이 두 사건을 보면서 필자가 슬픈 것은 순종하고 따랐던 착한 순종형 아이도,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였던 행동형 아이도 모두 이 사회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논리일 수는 있으나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처한 또 다른 형태의 모습일 수도 있다.
청소년의 문제의 발단을 찾을 때에 제일 먼저 소속된 가정의 형태와 엄마를 본다. 그 후에 아빠와 다른 가족을 본다. 소녀의 가정은 엄마가 이혼하였고 재혼한 아빠가 그 엄마에 대한 분노로 엄마를 닮은 소녀를 성폭행해왔다. 그리고 급기야는 살해까지 하였다. 두 번째 18세 남자 청소년의 가정은 아빠가 공무원이라는 것 이외의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으나 아이가 ‘나는 페미니스트를 증오한다. 그래서 IS에 가입하러 간다’라는 글을 남긴 것을 토대로 아이의 상태를 유추하여 볼 수는 있다. 아이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는 교우관계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상황이 있겠으나 총을 든 극단의 폭력집단을 선택한 것으로 볼 때 본인이 폭력적인 힘을 얻기 위하였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왕따에 의해 학교를 그만 두었고 그 원인을 본인이 힘이 없어서였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집에서 외출을 하지 않는 은둔형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접촉이 적었다. 그러면 페미니스트에 대한 증오는 결국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느낀 아빠에 대한 증오이고 그것은 결국 엄마에 대한 미움에서 출발한 것이다. 엄마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가정이었다고 유추된다. 결국 두 사건의 뒤에는 평탄하지 않은 가정 상태가 있었고 그 핵심에는 엄마가 있었다.
필자는 아쉬움에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두 아이가 서로 다른 선택이었다면, 여자아이가 가출을 했으면 살았을 것이고 남자아이가 소심하였다면 터키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한 번 더 뒤집어보면, 그렇게 돼서 집을 나온 아이들이 지금 거리에 떠돌며 불량아이로 취급을 받는 것이고, 그냥 소심해서 집에 있으면서 부모에게 불만이 많은 아이들이 터키로 떠나지 못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동아일보의 송평일 논설위원은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회에서 홀로 인생의 의미를 암중모색하면서 뭔가 강렬한 것에 이끌렸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IS의 영향력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악(絶對惡) 사우론의 자장처럼 멀리 극동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의 청소년들이 이제는 숨쉬기 위하여 거리로 나가는 것을 넘어서 사우론과 같은 악마의 힘이라도 얻기 위해 떠나야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아이들이 떠난 뒤에는 가정이 있다. 그리고 그 가정의 핵심에는 엄마가 있다. 사회의 상식에서 벗어난 철없는 엄마와 극성인 엄마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평범하고 일반적 우리 가정들의 또 다른 측면의 모습일 수도 있다. 어쩌면 터키로 떠난 김군을 부러워하는 아이들도 많을 것이다. 아니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김군을 동경하여 제2, 제3의 김군이 나타날까하는 것이다. 청소년을 둔 부모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다보아야 할 때이다. 욕심을 버리고 진솔하게 아이들과 소통이 절실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