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려소요’는 천자문에 나오는 글귀이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로 산려(散慮 :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면)를 해야 ‘소요(逍遙 : 노닐며 걷는다)’할 수 있다는 의미로 천자문에 넣어진 것이지만 정작 그 의미를 아는 이가 많지 않다. 동두천에 가면 산 이름에도 소요산이 있다. 사색하면서 걷다보면 신선이 된다는 의미이다.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또한 천천히 산책하면서 토론하였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같이 사용된 ‘소요(逍遙)’를 처음 말한 이는 중국철학의 양대산맥인 유가와 도가 중에 도가철학자인 장자(莊子)이다. 고전 장자의 처음 시작편이 소요유(逍遙遊)편이다. 소요를 하면 진정한 유(遊)를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장자가 말하는 유(遊)는 완벽한 자유이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유유자적한 자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을 의미하는 그런 절대적인 경지를 한마디로 정의한 것이 유(遊)이다. 그런 유를 위해서는 소요를 해야 한다. 정신인 자유를 누리는 작업이며, 이를 위해서 천자문에서는 산려(散慮)하여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는 것부터 하라고 조언한다. 결국 소요유는 복잡다단하고 구속하고 속박하는 세속적인 가치에서 떠나 끝없이 광활한 내면세계와 드넓은 정신공간에서 정신의 해방을 통한 대자유의 삶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장자는 처음을 붕새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북극에 사는 물고기인 곤(鯤)은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데 변화하여 새가 되면 붕(鵬)이 된다. 이 붕의 등은 몇 천리가 넘으며 한 번 날개를 펼치면 구만리를 날아 남극에 이른다. 장자는 붕(鵬)을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니는 정신세계의 상징물로 사용하였다. 장자를 해석한 책들을 보면 물고기 곤보다는 변한 뒤의 붕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필자는 곤에 관심이 간다. 몇 천리가 넘는지 알 수 없는 크기는 마치 인간의 욕심을 말하는 것 같다. 북극은 더없이 차디찬 현실사회를 의미한 듯하다. 그런 곤이 붕새로 바뀌어 하늘을 날고, 날개 짓 한 번에 북극에서 남극으로 오간다. 진정한 자유를 의미한다. 그런데 장자는 여기서 한마디 더 거든다. 새끼 비둘기와 1년도 못사는 매미가 떨어져 다치면 어쩌려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붕새를 비웃는다. 여기서 장자는 보통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도 북극의 곤임을 암시한다.
지금 한국 세상의 모든 정보는 온통 메르스가 장악했다. 그럼 메르스 이전엔 편안했던가를 생각해보면, 그러하지 않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아마도 소돔과 고모라도 지금보다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세상은 온통 더 이상 차가울 수 없는 북극의 상태이다. 장자는 중국 최대 혼란기인 춘추전국시대를 보면서 세상을 생명이 없는 북극으로 보았고 거기서 자유를 얻기 위하여 소요를 이야기하였다. 또한 천지만물의 근원을 도(道)라 하고 사람의 근원을 덕(德)이라 하였다. 그래서 삶의 근원적인 행동철학인 ‘도덕’이란 말이 나왔다. 이 시기에 공자는 혼란한 세상의 해결책으로 4덕(仁義禮智)을 이야기하고 그 중 최고의 덕목으로 인(仁, 어질 인)을 꼽았다.
우리 현실 사회가 2,000년 전의 춘추전국시대나 구약의 소돔과 고모라와 비교하여 전혀 뒤지지 않는 느낌이다. 간단하게 불과 30년 전과 비교하여도 지금의 상태는 너무 극단으로 흘러가고 있다. 사실 무서운 것은 전염병도 핵무기도 아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인성이 무너진 사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염병에 두려워하고 있다. 메르스의 공포라고 이야기하면서 TV의 막장드라마의 공포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메르스보다 택배로 죽은 아이를 보내는 현실사회가 더 무서운 것이다. 전염병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너진 인성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같이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북극같이 차가운 세상에서 모두 붕새가 되어 소요(逍遙)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