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밑에 자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인 법계사에서 이틀간 템플스테이를 하고, 다시 한려수도가 내려다보이는 고성 문수암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천년 세월을 묵묵히 지내신 법계사 부처님 사리탑과 천년 동안 중생들의 모습을 지켜보신 문수암 부처님에게 현대를 사는 지금의 중생은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해본다. 수명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삶은 윤택하여지고,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가족과 대화하고, 달나라를 넘어 화성에 착륙선을 보내는 지금의 중생을 어찌 볼 것인가? 이런 문명과 문화의 발달된 모습은 부처님의 해탈 전에 나타난 무수한 유혹의 한 가지일 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여본다.
돌아온 서울은 변함이 없다. 치과 원장실에는 그동안 읽지 못한 치과계 신문들이 쌓여서 탑을 이루고 있다. 신문 속의 치과계는 작년이나 10년 전이나 별반차이가 없다. 임플란트 덤핑이야기, 1+1광고 이야기, 스케일링 무료 시행 대법원 판결 불법 결정, 교정치료 275만원, 전문의제도 답보상태, 환자들의 생떼 백태, 생각지 못한 의료사고 등등 테마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방법과 가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12회 분할 납부라는 방식으로 세분화된 것이고, 가격이 더욱 낮아진 것뿐이다. 인터넷 뉴스에는 환율은 오르고, 방콕에서는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북한은 도발행위를 하여 남한은 대응을 한다. 일본 아베는 예상대로 70주년 담화를 하였고 주변국들은 비난을 한다. 분노를 못 참는 보복운전은 기승을 부리고, 할아버지들의 지팡이 차사고 유도까지 등장하였다. 항상 있던 일에 재료만 살짝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든다. 세상은 그래도 치과계는 그렇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세속화 되었나하는 의문이 든다. 20~30년 전만해도 지역이나 마을에서는 유지이고, 최소한의 품위와 품격을 유지하고 선후배간에 격이 있었다. 필자가 26세의 나이로 공중보건의로 보건지소에 처음 발령받아 갔을 때에도 초등학교 운동회에 초청되어 마을 유지석에 앉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치과의사모임에서 그 지역 개원의 선배님이 처음 공중보건의로 근무오던 날에는 군청에서 군악대 환영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왜 바뀌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환자가 바뀌는 것은 논의에서 제외하고 치과의사들만을 생각해본다면 무엇이 바뀌었을까? 가장 큰 원인은 수의 증가이다. 수의 증가는 다양성을 지닌 사람이 생긴 것이고 이것을 다시 하나로 통제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의미는 경제적으로 가치의 분배효과로 치열한 경쟁구도가 유발되고 최종적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회법칙이다. 따라서 문제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현상이고 흐름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현상도 의료계나 치과계에서 문제라고 인식되어지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목적이율배반에 있다. 의료의 목적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회사와 달리 인간 생명의 보호와 회복이라는 존엄적 가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와 같이 불법이 아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윤 추구가 비난이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즉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적 행위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보니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목적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의료의 존엄적 가치를 위하여 의사가 되었고 누군가는 생계를 위하여 선택하였을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시작은 존엄적 가치였으나 세상의 현실이 타협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이 경우가 대부분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이미 종교계에서도 나타난 현상이니 꼭 비난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생존을 위한 선택에서 안중근 의사와 같은 선택은 당신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다만 치과의사일 뿐이다. 단지 그런 치과의사인지 아니면 그래도 치과의사인지가 다를 뿐이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그분의 희생으로 생명이 아닌 선택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