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말씀 낮추십시오” 요즘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이다. 이제 쉰이 넘은 나이가 되고 보니 오랜만에 만나거나 전화 통화하는 후배들도 나이가 쉰 근처에 머무른다. 또 서로가 바쁘거나 생활공간이 다르다보면 10여년을 얼굴 한 번 못보고 지낸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10여년의 공간을 넘어서 동문회에서 만났다고 말을 바로 놓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각별하게 친했던 사이가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단지 시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후배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친했다면 사석에서는 평어를 써도 공석에서는 경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존대어는 상대를 높이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품위를 유지하는 문제도 있다.
필자가 아이를 낳고 기르던 언제부터인가 어머니가 필자에게 존대어를 쓰시기 시작하셨다. 반면 필자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평어와 존대어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나이든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에 평어를 사용한다. 예전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은 부부간에는 꼭 경어를 사용했다. 이렇듯이 존대어는 실제적으로 상하 서열의 관계를 의미하기보다는 상대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더 강하다. 어머니가 유치원 아이에게 존대어를 쓰는 것은 교육을 위한 것이고, 성인이 된 아들에게 사용하는 것은 사회에서 존중받는 행동을 하라는 의미이다. 또한 부부지간의 경어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방의 허물을 잘 알아서 존경하거나 존중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본적인 예의를 지니라는 의미였다.
얼마 전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후배와 통화하게 되었다. 후배는 말을 편하게 낮추어달라고 하지만 필자 입장에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하는 통화인 까닭도 있었지만, 이제 50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필자의 나이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가급적이면 상대에게 존칭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60세가 넘어서는 부부간에도 존대어를 사용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가까운 이로부터의 존중받는 표현은 한 개인의 지나온 삶의 가치를 인정받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상대에게 존대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나 명예의 문제가 아니고 살아온 삶에 대한 존중의 의미이다. 이 시대를 같이 살아온 선배, 후배, 동료들을 생각해보면 교활한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하나 힘써 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모두가 남모를 내적인 아픔을 한두 개는 지니고 있다. 거기에 치과의사라면 겪는 공통적인 아픔을 반문해본다. 여자 치과의사들은 가사와 직업에, 양육이라는 현실까지 더해지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면서 남모르게 속으로 얼마나 울었던가. 남자 치과의사들 또한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적응하느라 얼마나 잠 못 이루는 시간을 보내었던가. 이런 현실을 보고 듣고 경험한 필자가 어찌 단지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애환을 딛고 살고 있는 삶의 무게를 지닌 후배들에게 간단하게 반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살아온 흔적, 삶의 경험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의 힘을 느끼기 때문에 쉽게 반말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존대어를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존중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또한 이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도 있지만 필자 자신에 대한 존중도 있다. 예를 들어 80세 정도 된 노인 친구사이에 경어를 사용하는 경우와 비어나 속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옆에서 본다면 과연 어떤 느낌을 받을까? 필자는 존중받으며 아름답게 늙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사용하는 존대어는 “당신은 존대어를 받을 만큼 충분히 열심히 살았습니다”라는 의미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 체력적인 저하를 인식하는 50대 중반에 서서 자신의 내적 가치와 앞으로의 사회적인 역할을 생각해본다. 더불어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만나는 모든 이들을 존중하고 나 또한 존중받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더 나이가 들어서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