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장자(莊子)>에 나오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란 문구가 떠오른다. ‘무용과에 간 지용이’란 의미로 인터넷 웹툰 만화도 있지만 실제의 의미는 그것과 사뭇 다르다. 사전적으로는 ‘쓸모없는 것도 쓸모가 있다’라는 의미이지만, 그 의미는 실로 다양하다. <장자>에서는 “사람은 모두 유용(有用)의 용(用)만을 알고 무용(無用)의 용을 모른다”라고 하였다. 더불어 무용을 알아야 비로소 진정한 유용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한 사람이 길을 걸을 때 걷는 부분은 땅의 일부이다. 그래서 지면에서 발로 밟을 자리(유용)만을 남기고 그 밖의 부분(무용)을 모두 파내 버렸다면, 과연 사람은 보행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예를 들어 무용의 용을 설명하였다. 또 산의 나무를 예로 들었다. 잘생긴 나무가 빨리 잘려서 집짓는 용도나 가구의 용도로 사용되지만 못생긴 나무가 잘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결국 그로 인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면 비록 못생겼을 지라도 세월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즉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설명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고 살아온 세계 속에는 모든 것이 유용에 맞춰져 있다. 모든 교육은 어떻게 유용해질까만을 생각해왔다. 그래서 쉬지 못하고 끊임없이 일을 하지만 항상 부족함에 허덕이는 지금의 현실이 만들어졌다. 몇 년 전 열심히 놀아야 출세한다는 이야기를 한 교수가 유명해진 일이 있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장자가 말한 무용에 대한 이야기였다. 세상은 온통 유용에 대한 가치만을 논하지만 무용의 가치를 논하거나 관심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모든 생각이 항상 유용의 기준에서 출발을 한다. 그래서 무용을 유용적 입장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만 서로 존재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일례로 현시대의 가장 큰 딜레마인 노인 인구의 증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생산성이 없는 노인 인구는 골칫덩어리로 무용하다. 하지만 핵가족으로 가족이 해체된 현실사회에서 모든 구성원의 가장 큰 문제는 심리적인 외로움과 고립감이다. 그런 원초적인 외로움은 결국 자살률의 급증이라는 극단적인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이런 때에 노인들이 해체된 가족을 위로해줄 수 있는 구심점이 되는 사회적인 제도와 분위기를 만든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무용과 유용의 쓰임이 다름이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당연하게 무용의 유용적 가치를 사용하기도 한다. 자동차의 속도기를 보면 통상 시속 200~250㎞까지 적혀있다. 좋은 차는 350㎞까지 적힌 것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속도로는 120㎞가 제한 속도이다. 현실적으로 최고 속도로 달리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 최고속도는 달리면 불법이 되는 무용이다. 지금까지 필자도 최고로 달려본 것이 150㎞이다. 그런데 자동차의 가치와 가격은 최고 속도와 최고 속도에 이르는 짧은 시간에 따라서 결정된다. 무용의 유용성이다. 또 세계 최고급 와인 바에 가면 몇 백 년 묵은 와인이 있다고 한다. 한 병에 몇 억을 하는 관계로 수년에 걸쳐 그 와인이 팔린 적은 없다고 한다. 무용이다. 하지만 그 와인이 있음으로 해서 그 와인 바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고 그곳에서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은 비록 싼 일반 와인을 마셔도 좋은 와인을 마셨다는 믿음이 생긴다. 또 그런 와인이 비치된 곳에서 와인을 마신 것에 대한 자부심도 느낀다. 무용지용의 가치이다.
누군가가 현대인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고 비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족이란 비교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비교는 유용의 가치를 논할 때에 생긴다. 따라서 비교하지 않으려면 무용이 필요하다. 무용의 가치를 파악한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새해를 시작하는 정월에 무용지용을 생각하여본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 혜민스님의 말씀도 무용지용이다.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의 느림을 즐기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