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서울 성북동 어귀에 있는 작은 미술관 전시회를 계기로 간송 전형필(1906~1962)의 문화재 사랑이 재조명되고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문화재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전 재산을 쏟아부으며 거장들의 걸작을 수집하였다. 전형필이 수집한 소장품의 면면을 보면 김정희, 정선, 심사정, 김홍도 등의 작품으로 모두가 국보급이다. 지금의 간송 미술관을 탄생시킨 그의 애국심은 독립투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간송 전형필은 문화 독립 운동가라 말할 수 있다.
간송 전형필에 견줄 만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치과의사 함석태(1889~?)이다. 그는 최초로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 한국인(1914년 2월 5일),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 개원의(1914년 6월 19일경),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한성치과의사회의 초대 회장(1925년)과 같은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전형필과 함석태는 서로 다른 점도 있지만, 공통점이 참 많다.
함석태는 평안북도 영변군의 부잣집 독자로 태어나 약관의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함석태보다 17살이 어린 전형필은 서울의 대부호 아들로 태어났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함석태는 25세에 서울 남부 곡교에 건물을 신축하여 치과를 개원하였고, 전형필은 26세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문화재 수집을 시작하였다.
함석태와 전형필은 독립운동가 오세창(1864~1953)의 권유로 문화재 수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함석태는 특히 도자기를 좋아해서 호를 ‘토선(土禪)’이라 하였고 전형필은 오세창으로부터 ‘간송(澗松)’이라는 호를 선사 받았다. 두 사람은 근현대 미술 애호가 및 수장가 14인에 포함되었고 1940년 5월에는 조선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 십대가 산수풍경화전’에 함께 출품할 정도로 비슷한 수장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함석태는 일본을 왕래할 때 항상 ‘금강산 연적’을 지니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일본 형사들에게 까다로운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의 골동품 집착에 대한 소문이 나서 연적만은 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의 그 연적은 지금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어 평양 조선 미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전형필은 본래 주인이 부른 가격보다 열 배를 주고 사들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6.25 전쟁 때 낮에는 가방에 넣어 다녔고 밤에는 베개에 보관하여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훈민정음 원본은 지금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방 전후 혼란시기에 함석태와 전형필은 선택의 차이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함석태는 일제 소개령에 따라 1945년 자신의 소장품들을 평안북도 영변으로 옮겼다. 해방 후 함석태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고 다만 그의 일부 소장품들은 지금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 전시 중인데 차라리 그때 서울에 그대로 계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만 가득하다.
반면 전형필은 한국 전쟁 중 북한군에게 그의 소장품 전부를 뺏길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후 1962년까지 우리 문화재 보존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의 공로는 인정을 받아 1962년에는 문화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고 2014년에는 1등급 문화훈장 금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지금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 가면 간송 전형필이 보존한 대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2014년 12월 14일~2015년 5월 10일).
함석태는 일제 강점기 시절 국민의 구강 보건을 위한 계몽 활동에 앞장섰고,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저작 기능을 회복시켜 주었고, 강우규 열사의 손녀 강영재를 입양하여 건강한 지성인으로 성장시켰고, 망국의 한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순종의 치통을 해소했고, 간송 전형필 못지않게 조국의 문화재 지킴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어두운 암흑의 시대에 다방면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여준 대한민국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 탄생이 올해로 126주년이 되는 해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어디에도 함석태 선생을 기리고 추모하는 공간을 찾을 수 없다. 늦게나마 우리 치과계에서라도 그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드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