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래 교수. 그가 올해 40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한다. 이화여자대학교 이대목동병원 치과진료부의 현재를 만든 장본인인 김명래 교수. 그의 정년퇴임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이화의대 치과학교실 교수로서는 최초의 정년퇴임자로 기록을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김명래 교수의 발자취는 크게 3가지로 기억된다. 첫 번째는 의과대학병원 치과 발전의 큰 축이었다는 점, 두 번째는 국내 임플란트 대중화의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치과의사 전문의제도 실시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1976년 지금은 사라진 이대 동대문병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대문병원 치과는 “밖으로 난 창문이 겨우 하나밖에 없었던, 유니트 체어 1대만 덜렁 있던 그런 작은 진료실”이었다. 그로부터 39년 6개월간, 그는 이대를 떠나지 않았다.
김 교수는 “교수로서 치과대학과 치대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의대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던 작은 치과에서 공직을 시작한 건 아마도 운명이었던 것 같다”며 “의과대학의 변화 물결로 치과학교실을 설립해 치과의사로서 의대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고, 120여명의 전문의와 20여명의 석박사를 배출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일부는 치과대학병원 등에서 수련과정을, 나머지는 일반 개원가의 페이닥터나 바로 개원을 하게 된다. 김 교수는 “의과대학병원 치과의 활성화는 치과의사의 사회 진출을 더욱 다양화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며 “더욱이 무한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개원가로 치과의사들이 무작정 진출하지 않고, 중간에 완충지대를 거칠 수 있다는 면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명래 교수의 최근 20년을 돌아보면 ‘임플란트’ 관련 임상연구와 학회활동 그리고 임플란트 대중화의 첨병에 서 있던 모습이 선명하게 남는다. 김 교수는 “현재의 골유착형 임플란트가 국내에 처음 도입됐을 당시부터 임플란트가 치과계에 커다란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최초의 국산 임플란트를 일반 환자도 아닌 자신의 노모에게 직접 시술했을 정도였으니 그의 확신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이 된다. 그는 “임플란트가 보험화가 된 마당에 임플란트 대중화를 거듭 강조할 필요는 없다”며 “하지만 앞으로 30~40년간은 임플란트를 대체할 만한 아이템이 치과계에 나타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명래 교수의 연구실은 아직도 수많은 자료와 책자로 어지럽혀 있다. 정년을 몇 개월 앞둔 노 교수의 방이라기보다 한창 앞만 보며 달리고 있는 청년 학도의 공간과도 같다. 그는 “아마도 정년퇴임을 하는 날에야 ‘이제 정말 끝났구나’하고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이대에서 교수로서 재직하면서 치과진료부와 치과학교실, 그리고 임치원 발전에 온 힘과 정성을 쏟았다. 정작 연구활동에는 미진했던 것 같아 조금 후회스러운 면도 있다”고.
김 교수는 이제 자신만의 작은 클리닉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개원의로 얼마나 오래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라도 나만의 진료를 하면서 치과의사로서의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전했다.
신종학 기자 sjh@sd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