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촛불집회 관련 기사를 읽다보면 프레임이라는 단어가 가끔 나온다. “꼭 비폭력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야 하는가”라고 토로하는 집회참가자의 인터뷰 기사이다. 이는 몇 가지 생각을 요하는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가치에 대한 명제이다. 얼핏 생각하면 프레임을 벗어난 생각과 사상의 자유를 향한 메시지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생각과 사상을 넘어 행동으로 이어질 때는 법과 도덕이라는 규제를 받아야 한다. 또한 단순히 법과 도덕의 문제를 넘어 철학적 의미의 진리에 대한 정의도 수반되어야 한다.
우선 법과 도덕은 선악으로 구분된다. 선악은 이분법적인 논리로써 기준에 대한 상대적인 가치이다. 즉 내가 선이면 상대가 악이다. 그래서 철학과 종교는 상대적 개념인 선악보다는 진리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철학은 인간의 기준인 선악을 넘어 진리를 말하였다. 종교에서 기독교는 선악과를 말하였고 석가모니는 정도를 이야기하였다. 즉 동양철학은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바름(正)을 말하였다. 바름이란 상대적인 선이 아닌 절대 선이다. 종교는 이 절대 선을 행하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석을 한다.
철학은 절대 선에서 인간의 존재의 가치를 찾았다. 일반적으로 절대 선은 양심이라고도 표현된다. 이런 이유로 ‘비폭력의 프레임에서의 자유’는 선악의 상대적 기준을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절대 선으로 갈 수가 없다. 비폭력의 프레임을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 새로운 프레임 속에 갇히게 된다. 법과 도덕이라는 기존의 프레임일 수도 있고 스스로 만든 상대적인 새로운 프레임일 수도 있다. 기존의 프레임이라면 결과가 예측이 가능하지만 새로 만들어지는 프레임이라면 상대적 선악이 구분되기 전까지 극심한 혼돈의 과정을 겪어야한다. 그래서 간디는 비폭력주의를 말했다. 기존의 상대적인 기준의 선악 프레임 속에서 비폭력이라는 바름(절대 선이나 가치)이 지닌 가치가 상대적 선인 법의 위에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적으로 잘못 설정되고 동시에 선을 가장한 이기적인 법의 잘못을 일깨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선을 가장한 악법의 테두리 안에서 절대선의 가치를 증명하여 보이는 것이다. 절대 선의 가치는 상대적인 선악의 기준인 법이 지배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치이다.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는 조금 다르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정해진 법이라면 상대적 선(악의 선)이라도 인정을 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악의 선 속에서 선의 선으로 바꿀 것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한마디로 도덕적 우위를 잃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적 선이라도 반대하면 악이 되기 때문에 이미 정해진 프레임인 법을 부정하는 순간 도덕적 우위를 상실한다. 상대가 도덕적 우위를 점하면 상대가 하는 모든 행동에 합리적 타당성과 당위성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네이버 기사인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자녀와의 전쟁’으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호르몬의 불균형이란 공통점과 심리적으로 분노조절이 조금 어렵고 감정의 기복이 심함을 지닌다. 기사는 이런 두 사람이 매일 전쟁을 반복되는 가정이 많다고 전하였다. 이 때 사춘기 자녀와 분쟁을 막고 최소한의 부모로서의 지위를 지키려면 부모가 아이들에게 책을 잡히지 않을 정도의 도덕적 우위에 있어야한다. 직업, 인격, 성격 등의 자녀들이 감지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는 부모가 도덕성을 지녀야만 존경받지 못해도 최소한 비하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음식점을 하는 부모가 중국산 재료를 한국산으로 둔갑시켜 판다는 것을 자녀가 알면 부모의 도덕성이 하락한다.
이렇게 한번 하락한 도덕성은 다시 회복되기 어려우며 아이들 또한 스스로도 자존감이 떨어지고 심리적 프레임도 약해진다. 비폭력주위나 ‘악법도 법’의 두 개념이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것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악법은 그 속에서 악법의 논리로 변화시켜야하는 어려움이 있고 비폭력은 그것 자체가 바름(正)이기에 스스로 변화를 유도하는 면에서 다르다. 상대적 선악 너머에 바름(正)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