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두 번의 장거리 라이딩으로 지친 몸에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해 여름 복날이 되면 특별히 복달임 라이딩을 갖는다. 올해도 세 개의 복날 중간에 7월 15일을 택했다. 복달임은 삼복(三伏)에 고기로 국을 끓여 먹는 풍습을 말하는데 복날에 먹는 삼계탕이나 보신탕 등의 음식이 복달임 음식이다.
삼복은 음력 6월과 7월 사이에 있는 절기로, 하지가 지난 다음의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이라 한다. 경일은 10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庚’자가 붙은 날이며, 올해 하지가 양력 6월 21일이므로 첫째 경일이 6월 22일, 둘째 경일이 7월 2일, 셋째 경일이 7월 12일이다. 이에 7월 12일이 초복이 되며, 넷째 경일이 중복이므로 7월 22일이 된다. 말복은 입추 후 첫 경일이므로 8월 11일이다. 즉 초복과 중복은 10일, 중복과 말복은 20일 간격이 된다. 이 3복을 ‘3경일(三庚日)’ 또는 ‘삼복(三伏)’이라 부르고 있다. 이 시기는 여름 중에 가장 무더운 기간이며 이 더위를 ‘삼복더위’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복날에 궁중에서 관리들에게 쇠고기와 귀한 얼음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백성은 귀한 소고기 대신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개고기나 닭고기를 복달임 음식으로 먹었으며 그런 관습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복달임은 허기진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보양식을 섭취함으로써 더위를 물리치는 것으로 대표적인 복달임음식이 개장국(보신탕)이다. 지금의 보신탕은 예전에 개장, 구장(狗醬), 구탕(狗湯)으로 불렀다. 복(伏)자가 사람인(人)과 개견(犬)을 합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복날에 개를 삶아 먹는 것은 더위를 잊는 것뿐 아니라 보신과 액을 물리치는 효과까지 염두에 둔 의미라 할 수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개고기는 오장을 편하게 하며 혈액을 조절하고 장을 튼튼히 하며 골수를 충족시켜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하고 기력을 중진시킨다”고 하였다.
또 복날이 아닌 초복에서 말복 사이의 복허리 기간에 복달임을 먹는 것을 ‘복허리달임’이라 하였다. 우리는 복날을 피해 복허리날 복달임을 하기로 하고 7월 12일이 중복이므로 7월 15일 토요일 저녁에 한강변을 달린 후 왕십리에서 복달임 회식을 갖기로 하였다. 우리는 잠수교 북단 쉼터에서 왕십리까지 10㎞의 라이딩 코스를 달려 복달임 장소까지 가기로 정했다. 저녁 늦은 시간이라 길게 라이딩을 할 수 없는 점을 고려하여 ‘복달임 라이딩’의 의미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짧은 코스로 계획했다.
당일 저녁, 6시가 되기 이전에 응봉동 집에서 6㎞가량 떨어진 잠수교 쪽으로 달렸다. 그동안 너무 많은 비가 와서 그런지, 길이 온통 물바다고, 한강물도 흙탕물로 변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잠수교 북단 쉼터에 도착하니 잠수교 인도 상판 아래까지 황톳물이 찰랑거린다. 어제까지 잠수교가 물에 잠겨 통행이 불가했다고 한다. 쉼터에는 가랑비가 내리는데 멀리서 우리 대원 한 명이 달려온다. 이후 10분을 더 기다리다 아무도 오지 않아 둘이서 저녁 6시 왕십리로 출발했다.
잠수교(반포대교)에서 출발하니 한강 자전거도로는 곳곳이 물웅덩이다. 물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저녁 강바람을 맞으며 달려간다. 조금 가니 한남대교이다. 예전에 ‘제3한강교’라고 불렀다. 마포대교와 양화대교(제2한강교) 다음 세 번째로 건설된 다리, ‘제3한강교’가 ‘한남대교’로 바뀐 지도 퍽 오래된 것 같다. 혜은이의 1979년 노래 <제3한강교>를 흥얼거린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38년 전 한참 개업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료에 바빴던 젊은 나를 생각하며 페달을 밟는다. 그땐 꿈도 컸었지!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70세가 넘은 나이니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강변을 달리는 자전거 타는 노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조금 달리니 동호대교가 내 앞에 선다. 압구정동과 옥수동을 잇는 다리, 그동안 이 다리 밑을 수도 없이 다녔다. 이제는 길에 핀 야생화의 위치까지 꿰뚫게 되었다. 동호대교에 이르면 옥수동이다. 옛날 ‘옥종수(玉井水)’라는 샘물로 유명했던 곳, 그래서 옥수동이 되었다.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의 맛이 뛰어나 왕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옥수동에는 조선시대 유화정, 황화정, 쌍호정 같은 정자가 강변에 있어 아름다운 산수를 자랑한다. 이에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즐겨 찾곤 하였다. 옥수동의 본래 이름은 ‘두뭇개’, 또 ‘두무개’였다. 북쪽의 중랑천과 한강이 어우러져 물줄기가 두 개가 되어 두물개, 두뭇개가 된 것이다.
옥수역을 지나면 좌측에 응봉산이 서있다. 한강과 중랑천 합수부에 위치한 해발 81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경관이 뛰어나고 봄에는 개나리가 온통 산을 뒤덮어 ‘개나리산’이란 애칭도 갖고 있다. 조선 초 임금이 이곳에서 매사냥을 하였다고 산 이름을 ‘매봉’ 또는 ‘응봉(膺峰)’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달리는 한강변에 깎아지른 바위가 있어, 기암절벽이 강과 어우러지며 우리에게 비경을 선사한다. 이곳에는 낚시터가 유명하여 ‘입석조어(立石釣魚)’라 해서 경도십영(京都十詠)의 하나였다. 정상에는 팔각정이 있어 서울숲, 남산, 청계산, 우면산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어둠이 내리자 성수대교에 조명이 들어온다. 강물에 비친 다리의 모습은 황홀경을 연출하는데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세차게 우리의 머리를 두드린다. 성수대교 밑을 지나자마자 토끼굴로 들어가면 응봉동이, 철로길을 따라 가면 왕십리역이 나온다. 왕십리는 조선 초, 도읍을 정하려 이곳까지 온 무학대사가 늙은 농부로 변신한 도선대사로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말을 들은 데서 ‘왕십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답십리도 도성에서 십리 떨어져 생긴 이름이다. 왕십리 일대 벌판은 배추밭이 많았으며 퇴비로 쓰인 인분 냄새가 번져 파리 떼가 들끓었다. 이에 따라 ‘왕십리 똥파리’란 속어도 생겼다고 한다. 오늘날의 왕십리는 전철 4개 노선이 지나는 서울 최대의 역이자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밤비 내리는 왕십리 길을 달리다 보니 김흥국의 <59년 왕십리> 노래가 생각난다. 오늘처럼 밤비 내리는 낭만이 깔린 이 거리에 딱 어울리는 노래 아닌가.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 눈물을 삼키려 술을 마신다…」
비에 젖은 왕십리 밤거리를 자전거로 달리는 나에게 옛 기억을 되씹는 이 노래… 상왕십리 쪽으로 조금 달려, 손의채 생고깃집으로 향했다. 고깃집에는 모두 8명이 모였다. 우리 둘만 자전거 복장이다. 아무튼, 비 오는 날 친구와 함께 마시는 술 한잔!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복달임하는 방 안에선 고기 굽는 희미한 연기 속에 이야기꽃이 방 안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