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누님과 함께 계룡산에 있는 성혜사로 향하였다. 이른 아침이라 차 막힘도 없이 도착하여 여유롭게 행사에 참관할 수 있었다. 법문 도중에 세 잎 클로버를 코팅지에 넣어서 나눠주시며 우리들이 너무 네 잎 클로버에 집착하며 살았으니 이제는 세 잎 클로버로 만족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그동안 행운의 상징인 네 잎 클로버로 인하여 너무나 많은 욕심이 탄생하였으니 세 잎 클로버로 행운과 요행을 바라지 말고, 주어진 만큼만 얻고, 행한 만큼만 받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린다면 만족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법문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연휴가 끝나는 날이라서 1번 국도를 따라 올라왔다. 모처럼 1번 국도를 지나니 옛날 과거시험을 보기 위하여, 장사를 하기 위하여 한양을 향하여가던 선조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천안삼거리에 과거시험을 보러가던 전라도와 경상도 선비들이 서로 처음 모였을 것을 생각해본다. 그 시절 걸어서 3일이 걸리던 한양을 이제 2시간에 가도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는 지금 우리들의 삶을 돌아다본다. 3일을 2시간으로 줄였는데, 줄여서 남은 3일은 행복하고 여유롭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어려서 다니던 조계사를 들렸다. 항상 그렇듯이 조계사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지만 예전과 다르게 조용하다. 먹거리행사장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세월호 추모단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인간의 이기심의 총체인 세월호의 추모단상과 대웅전 부처님상의 오버랩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기원전 약 500년 전에 부처님이 탄생하셨다. 그 즈음에 중국에서는 공자가 태어나셨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도 탄생하셨다. 인류의 3대 성인이 모두 그 당시에 탄생하셨다. 그 당시는 한마디로 춘추전국시대였다. 최고의 혼란시대에 그분들은 인간이 가야할 길과 삶의 목표를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2,500년이 지난 지금에 인간욕심의 총체인 세월호가 만들어지고 300여명의 어린 삶이 희생되었다. 인간의 변하지 않고 놓지 못하는 욕심을 부처님은 가진 것이라고는 밥그릇 하나와 가사 한 벌 그리고 당신의 너무도 평범한 일상의 삶으로 가르쳐 주었다. 금강경은 부처님의 시주로 시작한다. 항상 그러하듯이 시주를 하고 돌아와서 식사를 마치시고 제자의 질문에 답을 하신다. 성도 이후의 일관된 부처님의 일상이었다. 항상 똑같은 어떤 변화도 특별한 일도 없는 삶의 위대함을 가르쳐주시고 몸소 실행하셨다. ‘색즉시공’에서 모든 욕심이나 집착이 의미가 없음을 말하시고, 다시 ‘공즉시색’으로 현실 삶의 만족만이 가장 중요함을 말하셨다. 평범함의 위대함이 아침 법문의 ‘세 잎 클로버’일 것이다. 어느 누군가가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욕심 없이 당연히 하였다면 세월호의 희생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무엇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당연히 해야 할일을 하기만 하였으면 없었을 일이다.
부처님의 변함없는 평범한 일상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심심해”라는 표현을 잘 듣는다. 하지만 “너무 바뻐”라는 말도 흔히 듣는다. 하지만 바쁘지 않고 조금 한가하면 바로 심심하다는 표현을 한다. 바쁨과 심심함의 중간에 우리는 자신을 만나게 되지만 자신을 만났을 때 스스로들 돌아보기보다는 외부에서 무엇을 찾는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심할 틈이 없다. 그 시간에 스마트폰을 본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만날 시간이 없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생각할 시간도 없다. 삶을 생각할 시간도 없고 가치관을 세울 시간도 없다. 단지 일과 스마트폰 사이를 오갈 뿐이다. 그러니 일에 있어서는 가치관이나 철학 없이 욕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생각도 없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마찬가지이다. 결국 밖으로는 세월호가 만들어지고 안으로는 자신의 삶이 세월호가 된다. 부처님의 평범한 일상과 세 잎 클로버를 보면서 내 안의 욕심들을 정리해본다. 항상 다람쥐 쳇바퀴 돈다고 투덜거리던 모습을 반성해본다. 더불어 평범한 일상의 위대성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