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 의료백서에 따르면 현재 지구상에는 약 7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취업을 위해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외국인 노동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게 되고, 3저 호황으로 3D 업종을 비롯한 중소규모 제조업이 인력난을 겪게 되면서부터다. 외국인 노동자는 여전히 국내로 들어오고 있고, 그 숫자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낯선 이국 땅에서 3D 업종에 종사하는 대다수 외국인 노동자들이 비싼 진료비로 인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치과진료 역시 마찬가지다. 편집자 주청년회의소 기념사업으로 첫 발 내딛어 “2004년 당시 외국인 불법체류 노동자는 국내에서 커다란 사회문제였습니다.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전반적인 시각이 좋지 않았죠.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국내에서 3D 업종에 주로 종사하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동남아 국가에 크게 이슈가 되면서 한국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들이 많이 보도되던 시기였어요. 당시 저는 대구청년회의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 소장으로 계시던 김
영등포 쪽방촌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 요셉의원은 영세민환자와 행려환자가 찾는 무료병원이다. 지난 26년간 내과, 외과, 산부인과, 피부과, 안과, 신경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에 영세민환자와 행려환자가 끊이지 않고 찾아오고 있다. 요셉의원 진료과목 중 먹는 즐거움을 찾아주는 치과의 인기는 가장 높다. 20명에 가까운 치과의사가 돌아가며 치과진료를 하고 있고, 이충규 원장은 22년간 요셉의원의 치과진료실을 지키고 있다.쉬운 봉사가 좋은 봉사에요~이충규 원장은 치과계 대표적인 의료봉사 단체인 녹야회의 일원으로 지난 1991년 8월 처음 요셉의원을 찾았다.녹야회는 이후 꽃동네 진료봉사로 자리를 옮겼지만 이충규 원장은 꽃동네 봉사는 물론, 매주 월요일 요셉의원을 찾아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한 주의 첫 시작인 월요일, 매주 빠짐없이 요셉의원을 찾는 것이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이충규 원장은 “내가 잘하는 것을 나눌 뿐”이라며 “개인치과가 아닌 요셉의원에서 환자를 만나는 것도 진료의 연장이다”고 말한다.이 원장은 “봉사는 보람을 찾는 것이 아니다”며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오랫동안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다.“봉사가 아니라 맛있는 밥을 먹으러
주말마다 ‘변신’하는 두 얼굴의 치과가 있다. 평일에는 여느 치과처럼 일반 환자들을 진료하지만, 토요일에는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진료소로 바뀌는 서울이웃린치과의 홍수연 원장을 찾았다.토요일 무료진료는 기본적인 치과진료부터 틀니·임플란트·교정 등 고가의 진료까지 가리지 않고 이뤄진다. 이미 진료를 받은 저소득층 환자도 300여명에 달한다. 사회복지사가 상주하면서 지역사회단체, 미혼모단체, 탈북자단체 등 20여곳에서 소개하는 환자에게 희망과 웃음을 주고 있는 홍수연 원장과 4명의 치과의사는 4년째 보람된 주말을 보내고 있다.‘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선택한 치과의사의 길치과대학을 다니면서 홍 원장이 가슴 아팠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필수적인 치과 치료의 많은 부분이 건강보험에서 제외돼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인 먹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치과진료조차 못 받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에 졸업 후 보건학과 공공정책 등을 따로 공부할 정도로 열정을 쏟은 시절도 있었다.어느날 인도의 비노바 바베의 말이 홍 원장의 가슴을 쳤다. ‘당신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지금부터 그 꿈꾸는 세상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라!’그 후 지역
지난 2009년 제1차 몽골 진료봉사를 시작으로 오는 22일 제5차 진료봉사를 떠나는 서울의료봉사재단(이사장 조병욱). 구순구개열 환자 무료수술을 비롯해 일반 치과진료에 이르기까지. 이미 몽골에서 서울의료봉사재단의 따스한 손길을 거쳐 간 환자는 현재 1,000명을 넘어서고 있다. 여기서는 전신인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간 서울의료봉사재단이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본다.봉사의 시작!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서울의료봉사재단의 전신은 지난 2008년 7월 법인설립 허가를 받은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이다. 2001년 국제로터리 3750지구 발안 로터리클럽에서 실시한 필리핀 구순구개열 아동 무료 수술사업이 단초가 돼 조병욱 이사장, 한국재 상임이사, 박영주 실행이사 등을 중심으로 몇몇 치과의사들이 뜻을 모아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을 설립하게 됐다.이후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은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국제 의료봉사를 통해 국가 간 협력과 교류 증진을 목표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게 된다. 추양국제의료봉사재단의 첫 해외봉사활동은 몽골이었다. 몽골 보건복지부, 그리고 한몽교류협회 몽골지부와 의료 협력에 관한 MOU를 체결하고 몽골에 추양진료센터를 개설하는 등 추양국제의료
내일을 여는 교실 운영위원장, 평양 겨레하나치과병원사업단 운영위원장, 시사인천 이사, 인천 사람과 문화 운영이사, 건강과 나눔 운영이사 등 수 많은 직책들이 정갑천 원장을 수식하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으니 이처럼 많은 직책이 생겼다는 정갑천 원장은 “치과의사이기에 가능한 것 같다”고 말했다.치과의사란 나누는 직업정갑천 원장은 학생 때부터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편이 돼 주었다. 치과의사가 되어서도 어려운 이들을 잊지 않고 찾기로 스스로 다짐했고 20년 가까이 그 다짐을 지켜오고 있다. 정 원장은 “어려운 이웃보다 많은 것을 받았고 그것을 돌려주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치과의사의 사회적 위치, 치의학지식 등은 사회로부터 받은 것이고 치과의사로 살아가면서 늘상하는 진료도 결국은 사회로부터 부여받는 사명이라며 치과의사는 사회의 도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는 소신을 전했다. 정갑천 원장은 “치과의사는 자신의 능력과 경제적 여건을 사회와 나눠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들려 올 때마다 이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정갑천 원장은 “나에게는
지난 6일 서대문구에 위치한 강대건치과에는 한센인들이 모여들었다. 한평생 한센인의 벗이자 대부로 살아온 강대건 원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다. 가톨릭 한센인들의 모임인 한국가톨릭 자조회(自助會)가 감사패를 전달한다는 소식에 강대건 원장과 인연을 맺은 한센인들이 전국에서 모인 것이다. 치과에서 만난 한센인들은 “평소 치과진료는 생각지도 못한 우리들에게는 크나큰 은인”이라고 입을 모았다.오롯이 한센인을 위한 주말강대건 원장과 한센인과의 인연은 34년을 거슬러 올라간 1979년부터 시작됐다. 가톨릭치과의사회 회장을 맡고 있던 강대건 원장은 당시 치과기공사의 모임인 녹야회의 진료봉사에 함께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포천 농축단지(음성 나환자정착촌)로 떠났다. 도착한 그곳은 참담했다. 찜통 같이 더운 날씨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판잣집에 살고 있던 한센인은 오랫동안 진료를 받지 못해 구강상태가 엉망이었다. 참담한 현실에 넋을 놓고 있던 강대건 원장의 눈에 봉사에 열중하고 있는 녹야회 회원들이 보였다. 강대건 원장은 ‘이렇게 더운 날 이 사람들은 돈을 주지도 않는데 이렇게 열심이구나. 나는 누군가를 위해 적극적으로 살아본 적이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
매달 365명의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자 하는 기업이 있다. 치과 교정재료 전문 쇼핑몰 오소마트다. 오소마트의 김기수 대표는 쇼핑몰을 통해 거둔 수익의 50%를 아프리카 아이들을 후원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우고 있다. 현재 오소마트에서 돕고 있는 아이는 9명이지만, 쇼핑몰을 더욱 활성화시켜 목표로 삼은 365명의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는 김기수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아픔을 나누기 위한 봉사김기수 대표의 후원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김기수 대표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한 아이에게 매달 3만원씩 후원하는 것으로 봉사활동에 발을 내딛었다.“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결단이 필요했죠. 결단을 한 뒤부터 지금껏 봉사와 후원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처음 후원을 시작한 우간다의 아이는 어느덧 고등학생이 됐습니다.”이렇게 시작된 후원 활동은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 인도 등을 포함해 현재 9명으로 늘어났다. 후원금도 처음 3만원에서 4만5,000원으로 올라 지금은 약 40만원에 달하는 금액을 매달 지원하고 있다. 한
인천에 위치한 장애인 학교인 연일학교. 그곳에는 1999년 치과보건실을 만들고 15년간 매일 출근하는 치과의사가 있다. 개원의로 40년을 보낸 우광균 실장은 연일학교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매일 아이들을 만나고 치료하는 연수동 슈바이처 우광균 실장을 만나봤다.장애 아이를 위한 제2 인생군의관을 예편하고 치과를 개원한 1960년, 치과가 자리를 잡자 우광균 실장은 봉사가 필요한 곳을 찾았다. 치과 하나 없던 덕적도에 1년에 1주일씩 진료봉사를 나가던 우광균 실장은 그곳에서 덕적도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최분도 신부를 만나 봉사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됐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99년 우광균 실장은 40여년 가까이 운영해 오던 ‘우치과’를 정리하고, 보유하고 있던 수억여원의 치과기자재를 연일학교에 기증했다.이후 휴일과 방학을 제외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15년 넘게 이곳에서 아이들의 치아를 관리해 주고 있다. ‘실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순수 봉사직이다.우광균 실장은 “처음 이곳에 와서 아이들을 치료할 때 대화라고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며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도 않고 앉혀놓아도 마구잡이로 몸부림쳐 매일 매일 전쟁을 치르듯 했다”고 회상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 그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이가 있으면 해외도 멀다 하지 않고 떠나는 치과의사. 통일부 장관 표창, 국무총리 남북관계발전공로민간포상에 이어 2013년 제11회 서울시치과의사회 치과의료 봉사상 수상자로 선정된 신덕재 원장을 만났다.어려운 이를 찾아 떠나는 길대학시절부터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 봉사를 하고 친구가 돼 이야기를 들어 주던 신덕재 원장은 1997년 IMF 이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자 1999년 봉사와 나눔을 함께 할 치과의사들과 함께 열린치과의사회(이하 열치)를 조직했다.신덕재 원장은 열치 회원들과 급격히 늘어난 노숙자를 위해 노숙자쉼터인 자유의 집에 치과진료소를 만들고 본격적인 봉사를 시작했다. 자유의 집 제1진료소를 시작으로 노인복지센터 제2진료소, 하나원 제3진료소, 중국동포의집 제4진료소, 하나원 분원 제5진료소, 충분 예산군 제6진료소 등 여러 곳의 진료소에서 본격적인 봉사를 전개했다.“봉사는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는 신덕재 원장은 봉사를 통해서 얻는 것이 더 많다고 한다. “하나를 나누면 둘이 돼 돌아오고, 베풀면 더 큰 대가를 받는다”며 “봉사는 결코 희생이
“많은 이사들과 운영위원들이 인정을 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활동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고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닙니다.” 치과계의 대표적인 봉사단체인 열린치과의사회(이하 열치)에서 매년 시상하는 봉사대상을 두고 한 김성문 회장의 말이다. 올해 열치 봉사대상의 주인공은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믿음치과기공소 이용기 소장이다. 그를 통해 봉사하는 즐거움을 느껴보자. “제가 받아도 되는 상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보다도 더 오랜 기간, 그리고 더 열심히 봉사에 임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수상하게 돼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더 열심히 활동한 뒤 받아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평소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줄곧 갖고 있었다는 이용기 소장은 우연치 않게 열치와 연이 닿아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됐다.“봉사활동을 시작한 지는 이제 7~8년이 돼 갑니다.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일정이 바빠 활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열치와 인연을 맺게 됐죠. 열치에 와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활동하지 못했던 제가 부끄럽게 느껴지더라고요. 다들 바쁘신 와중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셨거든요. 그 분들을 통해서 오히려
치과 한편에 기타와 피아노가 있고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치과의사, ‘영 뮤지션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그들이 외로운 사람을 찾아 공연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치과의사, 세상의 외톨이를 보듬어 안는 허그월드를 이끌고 있는 서성원 원장을 만났다.행복을 나누는 봉사 어린 시절 화전민의 생활이 궁금해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서성원 원장은 모두가 일 나간 집에서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을 봤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마주친 그 눈빛을 잊지 못해 외로운 이들을 위해 꾸준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지난해 8월 좀 더 체계적이고 더 큰 도움을 주기 위해 ‘허그월드’를 만들었다. 허그월드는 어려운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고 그들과 함께 은둔형 외톨이를 사회로 복귀시키는 활동을 하는 단체다. 허그월드는 ‘영 뮤지션 네트워트’를 만들어 젊은 음악인에게 힘을 주고 연습공간과 공연할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서 원장의 도움을 받은 젊은 음악인들은 자선공연 수익금을 사회 소외계층 지원사업에 기부하고, 소외받은 이들을 세상으로 이끌기 위해 직접 찾아가 공연을 하면서 그들이 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소외받은 이들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그들이 받은 상처를 치
치과의사 12명, 치과위생사 20명, 치위생과 학생 25명, 치과기공사 4명, 그리고 자원봉사자들…. 덴탈캠프는 범치과계 종사자가 함께 하는 작은 치과계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캠프’를 만들고 소풍 가는 마음으로 봉사를 떠난다는 덴탈캠프 최한선 원장을 만났다.장애인, 닫힌 문을 열기까지 평생 봉사활동을 해온 대부(代父)를 보면서 ‘나도 봉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는 최한선 원장.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오다 지난해부터 70여명이 함께하는 ‘덴탈캠프’를 이끌고 있다. 덴탈캠프는 소외된 장애인에게 완벽한 저작기능 회복을 선물하겠다는 목표로 2004년 설립됐다.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 시설에 ‘캠프’라 불리는 치과진료실을 만들고 시설에 있는 모든 장애인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방문치료를 이어간다. 충치치료나 발치뿐 아니라 의치, 임플란트까지, 완전한 치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더 이상 치료할 것이 없을 때까지 방문 진료한다는 최한선 원장은 “많은 곳을 진료하기보다 한곳이라도 확실하고 완벽한 진료를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덴탈캠프 설립초기 오히려 시설 측에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보여주기식 봉사활동이 아닌가 하는 경계심 때문에 봉사할
서울특별시 중랑구에 위치한 신내노인요양원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온다. 중랑구에서 개원하고 있는 허훈 원장을 비롯한 7명의 치과의사다. 2004년부터 시작된 발길은 올해로 10년째 꾸준한 진료봉사로 이어지고 있다. 10년 동안 봉사활동을 했지만 봉사팀 이름도 제대로 정하지 못했다. 그저 나누고 베푸는 것에 만족해할 뿐. 중랑구회 신내노인요양원 봉사팀을 이끌고 있는 허훈 원장을 만나봤다.빈 치과진료실에 퍼진 사랑의 온기신내노인요양원은 설립 때부터 요양원 어르신들을 위한 치과진료실이 마련됐다. 치과의사인 박정숙 수녀가 설립 초기 신내노인요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치과진료실은 텅 비게 됐다. 당시 중랑구치과의사회 회장이었던 허훈 원장은 신내요양원을 직접 둘러보고“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많아 방문 진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허훈 원장을 필두로 김윤만·선민권·안병주·정현구·한재범·허준호 원장이 2004년부터 봉사를 하고 있다.한동안 비어있던 치과진료실은 매주 토요일마다 환자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봉사에 나선 원장들은 “우리지역에 비어있는 치과진료실이 있고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있는데 직접 찾아 봉
전라남도 고흥군에 위치한 소록도에는 19년째 한센인들의 의사이자 친구로 살아온 이가 있다. 환자구역과 직원구역으로 구별돼 있는 소록도에서 한센인 마을에 놀러가 그들과 스스럼없이 밥상에 함께 앉아 밥을 먹고,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한다. 자신이 봉사하고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다. 소록도의 ‘재롱둥이’라 불리는 국립소록도병원 오동찬 의료부장의 얘기를 해본다.소록도의 가족으로… 1995년 공중보건의로 처음 방문해 19년째 소록도를 지키고 있는 오동찬 부장은 “소록도는 나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처음 소록도에 왔을 때는 진료나 수술을 받고 “감사합니다” 대신 “수고하시겠네요”라고 하는 환자들이 의아했다. 이 말이 정말 듣기 싫었던 오동찬 부장은 환자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1년만 있다 의사들이 떠나니 정을 주면 마음에 상처만 받기 때문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을 주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던 한센인들에게 먼저 다가가 밥도 먹고, 집안일도 돕고, 그들 집에서 잠도 자면서 의사와 환자 이상의 관계로 지냈다. 오동찬 부장은 “소록도는 나의 가족들(한센인들)이 있는, 나의 삶터다. 한센인은 찾아오는 가족이 있나? 가보고 싶은 곳에 갈 수가 있나?
연세대학교는 국내 대표적인 개신교 종교재단 사학이다. 특히 연세의료원을 중심으로 하는 의료파트는 종교적인 ‘미션’을 완수해 나간다는 사명감으로 무장돼 있는 듯하다.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진료봉사 동아리 ‘ESSEL’(에셀)은 이 같은 학풍을 가장 잘 이어나가고 있는 동아리 중 하나다. 지난 1971년 이웃한 학교인 이화여대 간호대학 학생들과 연세치대생들이 다락방 전도협회에서 첫 모임을 가지고 창단된 에셀은 올해로 창단 42주년을 맞았다. 특히 에셀은 지난 1993년 필리핀 딸락에 첫 발을 내디딘 후 지난해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해외진료봉사활동을 진행해왔다. 스무번의 해외진료봉사활동을 진행하는 동안 한해도 빠지지 않고 에셀을 이끈 인물이 있다. 바로 백형선 지도교수(연세치대 교정과)다. 20년을 한결 같이 봉사자의 자리를 지켜온 백 교수의 공로는 지난해 연세치대동문회(회장 정세용)의 ‘자랑스런 연아인 상’ 수상으로 치하됐다. 10명에서 40명으로 늘어난 봉사단백형선 교수는 연세치대 및 병원 내 주요보직을 지냈을 뿐 아니라 대한치과교정학회장 등 치의학계에서 굵직한 역할을 원활하게 수행해 왔다. 백 교수가 학교 내에서나 치의학계에서나 리더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