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임에서 이제 중학교에 들어가야 할 초등학교 6학년 아이를 둔 후배가 걱정을 털어 놓았다. 필자가 청소년지도학과 대학원을 다니는 것을 안 후배가 중학교에서 학교폭력이 많은 것에 대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었다. 사실 요즘 우스갯소리로 북한의 김정은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한국에 중학교 2학년생이 무서워서라는 말이 있다. 요즘 중학교 2학년생이 사춘기의 반항적 기질이 가장 심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일 게다. 사실 요즘 청소년들의 3대 문제점을 이야기하면 인터넷 중독, 학교폭력, 학교 밖의 아이들로 대변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엔 인터넷 중독은 스마트폰 중독으로 변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학교폭력은 줄어드는 추세라고 하지만 그 실상은 조금 의심이 된다. 학교 폭력을 정부가 척결해야 할 4대악으로 규정하여서 요즘은 좀 적어진 듯 한 느낌이지만 반대로 학교나 경찰이 사건이 생김으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고 쉬쉬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법이 엄격하면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죄질이 더욱 강력해지듯이 말이다. 더불어 또 다른 이야기가 들리는 것은 최근의 학교폭력 형태와 방법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본인이 직접
서울시에서 6급, 연봉 5,000만원에 한의사를 모집하였는데 36:1의 경쟁률을 보였다는 기사와 더불어 변호사 초봉이 200만원이 안되며 취직이 어렵다는 글도 보인다. 더불어 1만5,000명 정도의 공인회계사 중에 5,000명 정도가 휴직상태란 글도 보인다. 은행 조사에서 신용불량자가 가장 많은 직업이 의료인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를 대다수 사람은 ‘전문직종의 몰락’이라고들 표현한다. 하지만 필자는 ‘자연적이고 당연한 현상’이라 말한다. 간단하게 경제학의 가장 기초 논리인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른 자연현상일 뿐이다. 전문직 종사자의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물론 정책적으로 졸업생 수를 조절하기는 하였으나 고령화 현상으로 은퇴가 늦어지는 것에 대한 고려는 배제돼 급격하게 공급과잉 현상이 벌어졌다. 더불어 경기 침체로 고용은 증가하지 않으며 인구 또한 증가하지 않았다. 즉 공급과잉에 따른 가치하락이라는 당연한 사회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심리학에는 인구과잉에 따른 사회현상뿐 아니라 심리적 영향에 대한 연구가 많다. 실험에서 쥐 다섯 마리가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에 한 마리가 있으면 활동력이 떨어졌다. 반면 다섯 마리가 있을 때 가장 활발한 활동력을 보였다.
봉급생활자인 서민들에게 세금을 조금만 더 징수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는 심한 조세저항에 부딪혔다. 당국자들은 ‘거위에게서 털을 하나 더 뽑기’ 정도로 미약한 변화라고 설명하였으나 서민들의 분노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주일 만에 대통령이 원점 재검토를 지시하였다. 이를 심리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어설프게 결과 지향적으로만 정책을 진행하려하고 사람들의 심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태도변화’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의사전달자는 설득이라는 과정을 통해 상대방의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정부가 국민이 수용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하려면 설득이라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정부는 국민이 현실적으로 체감하지 못하는 많은 정책을 만들다보니 체감지수가 높은 정책도 같은 형태로 진행하다가 실패를 초래한 것이다. 정치가들이 국민 설득을 가장 잘한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다. 양대 진영은 선전활동을 통하여 설득과 태도변화에 집중하였고 특히 히틀러는 이 부분을 잘 이용하였다. 1953년 하버드대학은 설득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의사전달자, 의사소통, 목표대상이라는 설득의 3요소를 분석하였다. 즉 성공
아마도 10년 전 쯤 일이다. 기러기 아빠가 캐나다에서 공부하는 고등학생 아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엉덩이를 때리자 아들이 경찰에 신고를 한 사건이 있었다. 결국 체포된 아빠는 재판을 받고 강제 추방된 일이 한동안 문화적인 차이로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그런데 요즘 유사한 사건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며칠 전 아홉 살 난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가 컴퓨터게임을 하는데 밥을 먹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짜증을 내며 욕설을 한 일이 있었다. 이에 어머니는 아이의 뺨을 때렸고 아이는 어머니를 경찰에 폭행으로 신고를 하였다. 어머니는 경찰에 연행돼 가서 조사를 받고 아이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서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 이 씁쓸한 사건에 이어 이번에는 10대 소녀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48세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뺨을 맞은 17세 딸이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해서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일이다. 더욱이 딸은 강하게 아빠의 처벌을 원하고 있어 검찰로 송치 예정이라고 한다. 요즘 이런 일들을 보면 과거의 캐나다 기러기아빠의 아들 폭행사건이 한국과 캐나다의 국가적인 문화적 차이라고 보기보다는 국민소득과 사회제도의 발전단계 과정의 차이라 보는
지난 7일은 입추였다. 가을이 시작되는 날이다. 더위가 이제부터는 수그러들기 시작하는 때다. 조금만 지나면 가을을 느낄 수 있을 게다. 항상 가을이 되면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천고마비란 사자성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다’라는 의미라고 배웠다. 천고마비와 비슷한 의미로 추고마비(秋高馬肥)란 말도 사용을 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사실 추고마비이다. 가을이 수확의 계절이라 먹을 것이 많아 말도 살이 찌고 윤기가 나니 보기에 좋다’라는 의미다. 그러나 천고마비의 의미는 전혀 다른 뜻이다. 중국본토의 입장에서 항상 신경이 쓰이는 것은 기마민족들의 침략이었다. 기마민족들은 말이 살찌면 멀리 달릴 수 있기에 침략을 시작한다. 그래서 가을에 말이 살찌기 시작하면 기마민족의 침략을 경계해야 한다는 유비무환의 의미였다. 하지만 기마민족은 멀리까지 침략할 수 있는 시기가 되어 좋은 의미이다.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를 주는 단어이다. 하지만 각자가 아닌 한 사람에게 이와 같이 한 단어가 상반된 의미를 지닌 경우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상황이 동시에 나타날 때엔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고부간의 관계에 놓인 남편이라고 할 수 있다.
상가지구, 이전투구란 이 두 단어의 뒤에는 개를 의미하는 구(拘)자가 붙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를 의미하는 한자어가 두 개가 있다. 견(犬)과 구(拘)이다. 두 단어의 차이는 식용으로 쓰는 개는 구(拘)라 하고 식용이 아닌 경우에는 견(犬)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황구, 백구는 식용이었고 견(犬)은 견공(犬公)이라 하여 애완견으로 대접을 받았다. 아주 오래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반드시 올려야하는 음식이 보신탕이었다. 지금은 동물보호 차원에서 이런 저런 말이 많지만 역사적으로 개는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요즘 사람들에게 ‘상가지구’를 물어보면 대부분 상가가 밀집한 지역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상가지구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한자어로 상가지구(喪家之拘)라고 쓰면 ‘상갓집 개’라는 의미가 된다. 즉 초상집에서 바쁜 와중에 주인이 없으니 얻어먹지 못하고 천대받는 개라는 말로 그와 비슷한 처지인 경우에 사용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상가지구’에 등장하는 ‘상갓집 개’란 한자어의 주인공이 세계 4대 성인인 공자였다. 공자는 춘추전국시절에 자신의 철학을 펼치기 위하여 여러 나라를 다녔으나 항상 환영받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노
모일간지의 네트워크치과에 대한 기사, 그리고 치협의 행정소송의 패소가 지금 치과계의 정확한 사회적 위치이며 모습이다. 우리 치과의사는 양심과 사회정의, 그리고 진실을 법에게 호소하면 당연히 법이 해결해주리라는 지극히 이과(理科)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옳다는 생각과 법이 진실과 정의를 규명하는 과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과적 사고’의 전형적인 예로 얼마 전에 개최했던 심리학 강연회의 질문시간에 어떤 치과의사 선생님이 심리학 연자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불만환자 대응에 정답을 가르쳐주십시오!” 순간 필자도, 연자도 무척 놀랐다. 심리학에 어떻게 정답이란 말이 있을까? 우리 치과의사들은 정답을 외우고 살았다. 그리고 정답대로만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인문학에 어떻게 정답이 있는가. 법 또한 마찬가지다. 그나마 법은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기에 인문학인데도 불구하고 정답화하려는 노력을 많이 보인다. 법에는 정의, 합목적성, 법적 안정성이라는 세 가지의 이념이 있다. 정의는 사회의 정의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지 않게 법적 안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유지된 법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적과 일치하여야 한다. 즉 옳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스포츠 스타이며 연예인보다도 더 유명한 사람들이다. 3명은 축구선수이고 2명은 야구선수이다. 스포츠를 한다는 것과 유명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서로 비슷함보다 다른 점이 더 보인다. 심리학에서는 개개인이 한 사건을 해석하는 방법이 개성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 컵 속에 물이 반만 있을 때, 물이 반이나 남아 있다는 긍정적인 사람, 물이 반밖에 없다는 부정적인 사람, 물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는 회의적인 사람, 물 말고 햄버거 달라는 엉뚱한 사람 등 다양하다. 이런 차이를 개성이라고 한다. 위의 5명도 개성이 달라 보인다. 그런데 개성은 달라도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혼자의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생활을 영위할 때에는 사회가 요구하는 요구사항에 맞추어야 한다. 이를 사회성이라 한다. 특히 집단이 팀을 이루는 축구나 야구와 같은 스포츠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5명 중에서 박지성과 박찬호는 자신의 성격인지 아니면 노력인지는 모르지만 나이에 비하여 참으로 성숙된 모습을 보인다. 반면 이천수는 요란하게 등장하는 등 처음의 모습부터 약간의 악동 기질과 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경험하고 요즘은 다시 자리를 잡아가
최근 TV 뉴스를 보면 모 국제중학교의 입시비리문제로 온 나라 전체가 들썩거리도록 난리가 아니다. 급기야는 조사를 받던 교감선생이 자살을 하기까지 상황은 최악에 다다르고 있지만 의혹은 더욱 증폭되어 가고 있다. 마치 복마전을 연상케 한다. 밝혀지는 내용은 온갖 비리의 총결정체로 비리의 교과서를 보는 듯 하여 마음에 충격이 심하다. 더욱이 그것이 교육계의 비리이기에 더욱 가슴 아프다. 이번 사건은 옛날 촌지와 같이 내 아이를 조금 잘 봐달라는, 약간의 이기심은 있지만 모성애가 느껴지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조직적이고 시스템적이다. 심지어 대외적으로 선전에 사용할 희생양의 학생까지 구색을 골고루 갖추어 놓고 부모들의 심리를 이용한 장사를 했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장사할 곳이 생기면 기존에 진학하고 있는 학생 중에서 희생할 아이를 선택하였다. 사소한 문제라도 발생하면 그것을 구실로 아이를 퇴학시키고 그 자리를 다시 매매에 이용하는 진정한(?) 상인의 본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교육자로서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다. 2천년 전에 장자는 도둑에게도 도덕이 있다고 하였거늘 그들은 교육자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양심도 없었다. 도둑이 앞장서서 먼저 들
전에 들어서 알고 있던 유머가 하나 있다. ‘황당과 당황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버스를 타고 가던 사람이 갑자기 큰 볼일(?)이 급해 운전사에게 이야기 하고는 버스 뒤에 숨어서 볼일을 보게 되었다. 그런 중에 갑자기 차가 앞으로 전진하는 경우를 ‘황당’이라고 하고, 버스가 갑자기 후진하여 볼일 보던 곳에 주저앉는 경우를 ‘당황’이라고 한다는 유머이다.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당황스러운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며칠 전 일이다. 힐링을 위한 심리강연회를 준비하면서 이틀 전에 강연장의 장비들을 모두 점검해 놓았다. 그런데 당일 아침 강연 전에 아무리 해도 프로젝터가 작동되지 않는 게 아닌가. 일요일이라서 담당자도 없고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시간 안에 해결하지 못하고 프로젝터 없이 첫 강연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첫 번째 연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 사이에 담당자에게 연락해 결국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급히 와서 점검하고 하는 이야기인 즉, 하루 전에 강연장을 사용한 사람들이 항상 작동해야하는 기계를 실수로 꺼버려서 발생한 일이고 이런 일이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란다. 황당한 일이었다. 강연회가 끝
요즘 TV 드라마를 보다보면 내용이 잔인하고 역겨워 다른 채널로 바꾸거나 차라리 시청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막장을 넘어 사이코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 자극적인 것을 택한다지만 점점 도를 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심리적인 한계가 있건만 정상적인 삶의 내용을 넘어서는 과도한 전개로 인하여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드라마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느끼고 괴로워할 수 있는 범주를 다뤄야 한다. 그런데 주인공들의 심리적인 상태에 대한 고려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시청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작가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주인공들의 심리 상태로 인하여 실제적인 사람들의 심리와는 전혀 다른 행동이 나타난다. 슬퍼해야 할 상황에서 담담하거나 공포 상황에서 웃는 것 같은 일반 심리와 위배되는 행동으로 시청자에게 혼란을 준다. 더불어 병적심리와 정상심리 사이를 멋대로 이동한다. 이런 경우에 시청자도 정서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드라마가 나쁜 드라마다. 자의든 타의든 나쁜 일을 했을 때에 사이코패스가 아니고는 심리적으로 갈등을 겪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의 악당은 모두가 심리적인 갈등이 없다. 더불어 그 악역과 같이 동참하
몇 달 전 일이다. 일본에서 수련하던 시절의 일본인 수련동기로부터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위급함에 걱정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글의 말미에 전쟁이 발발하면 일본에 있는 자기 집으로 오라는 근심어린 당부의 말도 있었다. 반년 이상을 유지해오던 남북한의 긴장관계가 만들어낸 촌극과 같은 메일이었다. 걱정해주는 마음은 감사했지만 연례행사처럼 겪는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보니 씁쓸하였다. 이런 긴장상태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고, 그런 일들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개개인 모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역사가 만들어낸 사건이 개인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직접 미치는 일례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역사는 단순히 지나가버린 과거 사건들의 모음이 아니라 현실에 강한 영향을 주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얼마 전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질문으로 전쟁을 유발시킨 쪽이 북측인지 남측인지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답변에서 남침이란 정답을 맞힌 청소년이 70%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그 원인으로 역사인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남침’과 ‘북침’이란 단어를 몰라서 틀렸다고 한다. 답은 북에 의한 남침이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요즘 치과전문지를 뒤적거리다보면 인문학과 관련된 강연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잊고 지냈던 것에 대하여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지금 치과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일들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에 또한 반갑다. 누군가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흙을 만지고 모래놀이를 하며 학교가 파한 뒤에 하루 종일 잠자리를 잡던 추억을 떠올린다면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고향이 있다. 그 고향의 추억은 힘든 삶 속에서도 견디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준다. 잠시 차 한 잔을 마시며 과거의 추억 속으로 여행을 다녀오면 현실을 다시 견딜 수 있을 만큼의 희망과 에너지를 받는다. 어려서의 행복했던 순간들의 추억과 경험은 그렇게 삶에서 순간순간 행복의 끊임없는 원천이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사라진 세대들이 많아졌다. 어린 시절의 그리운 추억은 없어지고 입시 교육과 무한경쟁 속에 내던져진 삶을 사는 시절을 겪다보니 좌우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이 너무도 많아졌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황금만능주의와 남을 이겨야 내가 산
이미 사회 속에서도 많은 곳에서 객관적인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을 알게 모르게 사용하고 있다. 말은 객관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집단이기주의적 경향을 짙게 띠고 있다. 원인은 따지지 않고 결과만을 생각해 필요에 따라서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다.예를 들면 청소년 학교폭력이 증가하는 것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학교폭력이 있는 학교를 실태조사하면 학교폭력이 발생한다고 보고하는 학교가 거의 없다. 이는 학교폭력을 직접 담당하는 일선 학교에서 폭력사실이 학교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원인을 찾아서 밝히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지 별일이 없는 것으로 덮으려는 것도 이미 학교의 집단적인 이익을 위한 이기주의에서 만들어진 묵시적인 프레임인 것이다. 이런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객관적 프레임의 한 형태이며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소위 말하여 ‘쉬쉬 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곳에는 거의 이런 현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부정적인 객관적 프레임의 형태라고 본다. 반면 긍정적인 형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식당처럼
우리는 살면서 거짓과 진실을 구분해야하는 경우를 많이 직면한다. 그럴 때마다 심리적인 고통을 받거나 정서적으로 힘든 시간을 겪는다. 가까이는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 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에 서로간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경우를 종종 접한다. 그때마다 원장들은 판단의 어려움을 겪는다. 또 드문 일이지만 대변인 성추행사건처럼 기자회견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는 것이 속속 거짓으로 들어나는 것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여야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국가적인 거짓말을 처음 눈으로 접한 것은 일본에 갔을 때이다. 일본정부가 너무도 당당하게 독도가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국가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권위를 이용한 거짓말이다. 이런 식의 크고 작은 거짓말들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접한 필자는 나름대로 거짓말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거짓말은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며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진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세운 이 가설을 사건들에 대입해보니 모든 것이 잘 해석되었다. 사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금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