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이나 ‘묻지마’ 라는 단어를 뉴스에서 많이 듣는다. 일명 ‘묻지마 범죄’말이다. 불특정 다수를 항한 범죄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본인의 분노나 고통을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기 위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사회심리학적으로 양극화 현상의 심화된 상태에서 심리구조가 취약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실패나 좌절을 경험했을 때, 극단적인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분노 조절이 안 되어 타인에게 폭발되는 경우이다. 분노나 좌절이 본인에게 향하면 자살이 되고 타인에게 향하면 ‘묻지마 범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원래 ‘묻지마’의 시작은 ‘1. 이름을 묻지마, 2.나이를 묻지마, 3. 연락처를 묻지마’ 라는 은어에서 시작되었다.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진입하면서 어려웠던 집안생활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며 집집마다 자동차가 생기기 시작하던 80년대 초반에 처음 등장한 단어이다. 강남이 처음 개발되기 시작하며 신흥 부유층이 강남으로 이주하던 때이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던 여성들이 처음으로 자동차를 지녀 기동력이 생기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지만 외로움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고 욕구불만을 표출하기 위하여 소위 안전한 즉석만남을 시도하였다. 그것이 ‘묻
‘딜 레마’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di(두번)와 lemma(제안·명제)의 합성어로서 두 가지의 명제 사이에서 한쪽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더불어 ‘산미치광이’란 고슴도치처럼 몸과 꼬리가 가시 털로 뒤덮인 동물로 ‘호저’라고도 한다. 그런데 심리학에는 ‘산미치광이의 딜레마’ 혹은 ‘멧돼지의 딜레마’라는 표현이 있다. 미국의 정신과의사인 벨락이 쇼펜하우어의 멧돼지 우화를 인용하여 인간의 갈등관계를 해석했다. 우화의 내용은 멧돼지 두 마리가 있었다. 날씨가 유난히 추운 겨울날 밤이 되자,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을 기대려 하였는데, 너무 가깝게 가면 자신들의 피부에 돋아있는 가시와 같은 털이 서로에게 상처를 냈다. 그래서 떨어지면 추워지므로 멧돼지들은 서로의 몸에 상처를 주지 않고 상대의 체온이 느껴지는 거리를 찾아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적절한 거리를 찾는다는 이야기이다. 남녀관계에서 발생되는 갈등을 설명하면 쉽게 이해되기도 한다. 가까이 가는 것을 ‘사랑’이라 하면 떨어지는 건 ‘미움’이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은 늘 공존한다는 숙명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붙지도 못하고 떨어지지도 못하는
유명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의사를 ‘명의’라 한다. 신이 내린 실력을 지닌 의사를 ‘신의’라 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의는 허준이며, 중국 최고의 명의에는 화타와 편작이 있었다. 그들은 ‘신의’의 경지를 넘어 마음으로 치료하는 의사 최고의 경지인 ‘심의(心醫)’이신 분들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느라 과거 시험을 못 본 허준의 일화는 유명하다. 의성 화타에게는 어느 부잣집 하인이 왕진을 부탁한 일화가 있다. 주인이 감기 정도로 부른 것인데 화타가 직접 왕진을 하였다. 이에 굳이 직접 가지 않아도 되는데 왕진하는 것에 제자가 돈 때문인가 하고 묻자, 화타는 본인이 가지 않으면 하인이 추궁당할 것을 염려하여 간다는 말을 하였다. 그렇듯 마음의 의사였고 삼국지의 조조가 주치의로 지속적으로 군영에 머무를 것을 명령하자 자신을 필요로 하는 백성을 치료하러 가야한다며 명령을 거부하여 사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의사는 환자 앞에 있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의료인의 마음의 자세를 말한 것이다. 의사의 경지가 아닌 성인의 반열에 이르신 분이라 하여 ‘의성(醫聖)’이라 하였다. ‘신의’ 편작은 병이 시작하기 전에 미리 질환을 다루는 것이 최고의 의사라 하였다. 그런 편작도 6가지
대한민국 펜싱 여자 국가대표 신아람 선수가 런던올림픽에서 1초의 시간만 지나면 승리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1초가 흐르지 않고 멈추어 버린 상태로 경기가 지속되어 패배하였다. 잘못된 판정 후에 경기장을 떠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주저앉아 있는 사진을 보고 있으면 편파 판정에 대한 분노보다도 이제 20대 나이인 젊은이가 추악한 세상의 모습을 보고 저항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느껴야 할 마음이 전해져 가여움과 안쓰러움에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낀다. 메달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도 그렇게 믿어왔던 신사 스포츠라는 펜싱의 추악함을 본 것에 대한 실망감이 더욱 가슴 저리도록 아플 것이다. 실망감이라기보다는 배신감이라는 표현이 더욱 맞을 게다. 요즘 흥행하는 영화 중에 배트맨 3편이 있다. 내용 중에 배트맨이 믿고 모든 것을 맡겼던 여주인공이 배신을 하며 최고의 반전을 준다. 그때 배트맨이 받은 느낌이 아마 이런 배신감이었을 게다. 영화에서도 그런데 실제 삶속에서의 반전은 얼마나 가혹할 것인가. 심리학에서 ‘사람의 마음에 과거는 극약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차라리 모르고 살다가 죽으면 좋을 것을 너무 많이 아는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아
'추적자’라는 드라마가 대선을 앞둔 시기에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막을 내렸다. 결론적으로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회의 사건들이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는 메시지 말이다. 모든 것은 바둑에서 미리 선수를 두듯이 필요한 자의 전화 한통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강한 이미지를 만들어주었다. 그런 관점에서 요즘 일어나는 의료계의 상황을 추리해보자. 포괄수가제 실시에 저항하는 의사들을 매스컴이 여론조사로 파렴치범으로 매도하려하자, 의사들은 저항을 접었다. 이런 시점에서 요즘 갑자기 의료드라마가 증가했다. 히포크라테스 같은 헌신적인 의료인을 부각시킨다. 마치 북한에서 김정일 초상화를 지키다가 산사태가 발생한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죽은 초등학생을 영웅화시키듯 말이다. 그러면서 공정위는 치과의사협회를 파렴치범으로 몰고 9시 뉴스를 내보냈다. 더불어 마치 불법네트워크 치과가 밥그릇싸움에서 이긴 듯한 이미지를 주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또다시 9시 뉴스에서 느닷없이 치과의사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치과의사들 끼리 주고받은 환자에 대한 대화 내용을 가지고 치과의사의 자질을 평가하고 전체적인 부정적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우연일까? 추적자적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우연이 아니다. 의
며칠 전, 이제 여든 셋이신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 전통무용 구경을 다녀오는 길에 유난히 수척해진 모습에 혹시 체중이 줄었냐고 물으니, 3㎏이 줄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항상 규칙적인 운동과 정확한 시간에 식사를 하는 분이기에 무슨 특별한 변화라도 있나 싶어서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하고 천천히 말을 건네 보니, 틀니가 아파서 식사하기가 불편해진 지4~5개월 되셨다고 답변하신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는 순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치과의사고 집도 걸어서 10분 걸리는 거리인데 틀니가 아픈 것을 4~5개월이나 참으며 말을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식들 바쁜데 폐를 끼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얘기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결국 만들어드린 틀니를 잘 쓰시는지 물어보지 못한 자식의 잘못으로 결론을 짓고 이야기의 화제를 돌렸지만 아들 입장에서 무엇인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무엇이든 말씀이 없으시면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는 있지만, 조금의 힌트만 주었어도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 말이다. 그런데 어제 일이다. 병원으로 꽃이 한 다발 배달되어 왔다. 근무하는 예쁜 여선생의 생일이란다. “남편이 보내주어서 좋으시
며칠 전 청주시립무용단의 공연이 있어서 인간문화재 선생님과 몇몇 지인들과 같이 공연을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폭우를 만났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관계로 결국 새벽 3시 즈음에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분이 오전부터 약간의 치통을 호소하더니 공연 후 뒤풀이 모임에서 한잔 한 이후로 통증이 심해지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는 매우 아픈 상황이 되었다. 급성치수염 정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들이 치과의사인 필자를 바라보았으나 필자의 병원은 교정치료만 하다보니 일반 진료 기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치료가 어려운데 일반인들에게 설명하기가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기로 하고 강남에 있는 모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서 접수를 시키며 치과선생님들이 계신지를 물으니 계신다는 답변을 들었으나, 일단은 응급의학과에서 보고 난 다음에 치과 선생님을 불러준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지금 환자가 많이 밀렸으니 1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할 거라는 답변을 들었다. 치과환자를 응급의학과가 보아야 한다는 말이 도무지 수긍이 안 된 필자가 신분을 밝히고 응급의학과 담당의를 만나서 치과진료를 응급의학과에서 하는지를
옛날 우리 어른들은 새로이 집에 들어오는 물건이나 남이 쓰던 물건을 집에 들일 때에는 화장실에 반나절 두었다가 집안으로 들이는 풍습이 있었다. 남이 쓰던 물건이나 다른 곳에서 새로이 집에 들어오는 물건에는 나쁜 귀신이 붙어서 따라올 수 있는데 화장실에 반나절 정도 놓아두면 냄새가 고약하여 도망가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보면 남이 입던 옷에는 이나 벼룩과 같은 다른 병원체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이 화장실의 암모니아 냄새로 인하여 적어질 수 있다는 선조들의 지혜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 가족들의 스마트폰을 모두 걷어서 화장실 변기통 위에 올려놓은 일이 있었다. 물귀신처럼 스마트폰의 귀신이 계속해서 부르기 때문에 필자가 붙인 귀신이름이다. 방학이 되어 외국에 있던 아들과 딸이 귀국해 모처럼 한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집중이 안 된다. 또한 식사가 끝나도 서로 대화할 시간이 없다. 스마트폰에 컴퓨터까지 잡고 살다보니 식사시간 마저 대화가 없다. 그래서 식사시간에 스마트폰을 놓게 하였더니 밥을 먹는데 정신이 나가 있다. 허둥지둥 식사하고는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든다. 이에 필자가 스마트폰에는 물귀신보다 더 심한 귀신이 사는 것을 감지하고
의료보험제도가 처음 시작이었다. 전 국민의 강제적 의료보험제도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성격이 아주 강한 제도였다. 의미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의사들이 조금만 손해를 보라는 것이었으며 의사들이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시대였기에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의약분업이 시작되었다. 의약분업은 의사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주었다. 의사에게 약이란 검객의 칼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정부가 평화 시대에는 검객이 필요 없다는 논리로 칼을 빼앗듯이 그렇게 의사에게서 약을 빼앗아 갔다. 진정한 검객은 칼을 사용할 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칼에 대한 모든 지배권을 지녀야 했는데도 말이다. 그 후에 지속적으로 수가를 묶으며 낮추는 방법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사들이 필요 이상의 폭리를 취한다는 언론 플레이를 해왔다. 더불어 일부 몰지각한 의사들의 파렴치한 행동은 전체적인 의사들의 이미지로 구축되어 왔다. 결국 이제는 의사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여론은 잘 먹고 살만한 이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로 받아들이며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미 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포괄수가제도를 들고 나왔다. 한마디로 음식점의 전국 비빔밥 가격을 동일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안에 들어
스위스를 여행하던 미국인 부부가 딸에게 줄 인형을 고르다가 독일에서 만든 예쁜 성인 인형을 샀다. 1950년대였기에 인형들은 모두가 종이인형이나 어린 아이 모양의 인형이 고작이었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것을 딸에게 선물하였다. 그 부부는 미국에서 장난감회사 사장이었고 그것을 계기로 성인여성의 인형에 대한 영감을 받고 디자인 작업을 하였다. 디자인 작업은 미국에서 유도탄을 디자인하던 사람에게 맡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형은 시판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팔려나갔다. TV에서까지 광고를 하는 대인기를 누렸으며 2000년에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품으로 타임캡슐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은 인형이 있다. 그것이 1959년에 만들어진 ‘바비인형’이다. 그리고 그 바비인형의 몸매가 38-18-34이다. 바비인형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인형 판매에 있어서 최고다. 연간 13억불의 매출을 일으키는 꺼지지 않는 인기를 지속적으로 누리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사장 부부가 스위스에서 사간 독일인형은 ‘릴리’라는 이름의 인형이었다. 그리고 그 릴리는 히틀러가 만든 인형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당시 윤락가를 드나들던 독일병사들이 매독에 걸리는 일이
얼마 전 직업만족도 발표가 있었다. 치과의사가 291위를 했고 치위생사가 189위를 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치과의사보다 조금 낫지만 별반 차이가 없는 250위를 했다. 결코 녹록치 않은 직업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조사기관에서 설문조사한 것을 보면 간호사가 직업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는 설문조사에서 88%의 답변이 감정을 숨기고 웃어야 하는 고통이라고 답변하였다. 이런 경우 심리학에서는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Smile mask syndrome)’이라는 것이 있다. 즉,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인정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 뒤에는 오히려 더 우울해지는 증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임상적으로는 만성피로, 소화불량, 불면증 증상을 보인다. 결국 내면의 기분과 상관없이 항상 동일한 웃음을 주어야 하는 직업 종사자들이 모두 당면한 일이다. 아마도 의사, 치과의사, 간호사뿐 아니라, 스튜어디스, 백화점 종사자, 호텔리어, 은행원 등 창구에서 대민업무를 시행하는 서비스 종사자는 모두 해당될 것이다. 특히 친절을 강요당하는 간호사, 스튜어디스나 호텔리어는 더욱 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만의 심리적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다른 신체적인 증상이
“원장님, 두 번째 체어에 앉아 있는 환자가 3년 전 장치비를 안 내고 갔던 환자입니다”라고 실장이 조용히 말한다. 3년 전, 환자가 교정장치를 제거하는 날은 유지장치 비용이 있음을 미리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오셔서 비용을 지불할 거라고 하여 장치를 제거했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고 20대 후반인 본인은 카드도 없고 현금도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실장이 직접 엄마와 통화하고 내일 와서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날 이후로 환자나 엄마가 전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실장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런 사연을 알고 환자 곁에서 무슨 일로 내원 했는지를 묻자, 유지장치를 분실하여 새로 만들고자 한다고 했다. 이에 3년 전에 치료비가 지불되지 않았음을 주지시키고 유지장치를 찾으러 올 때는 반드시 비용을 지불하셔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장치를 찾아가는 날에 데스크가 소란해 가보니 환자가 또 비용 준비를 안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또 엄마가 내일 와서 준다고 한다. 3년 전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에 필자가 엄마와의 통화를 원했고 환자가 전화를 걸어주었다. 3년 전 상황을 이야기하고 송금해줄 것을 요구하였더니 등산 중이어
“선생님, 드디어 남편이 일요일에 TV 야구를 안 보기로 했어요!^^”하고 뿌듯한 듯 제자가 이야기 한다. 개업의를 남편으로 둔 제자이다. 같은 직종의 종사자로 같이 일하고 힘든데 남편이 휴일에 설거지도, 아이를 돌보는 일 등의 가사 일도 전혀 돕지 않는다는 것이 전부터 불만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왜 그리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친구들은 모두 남편이 가사 일을 도와주는데…”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필자가 “그럼 다른 직장인 남편보다 의사라서 경제적으로 나을텐데 그것에 대한 보상은 무엇으로 해 주고 있나요?”라고 물었다. 남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남보다 조금이라도 못 받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다 받아야한다는 욕심인 것인가? 물론 아내에게 휴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은 본인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남편에게도 잘못은 있다. 그런데 야구장에 직접 가서 현장에서 생맥주 한 잔 마시며 목이 터져라 응원하며 관람하고 싶은 마음을 접은 이유가 휴일에 가족을 버리고 나간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십분 양보해서 집에서 TV를 보는 마음을 아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야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언제부터인가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것 같다. 쉰하나의 나이에 정체성 혼란이 무슨 말인가 싶지만 내면의 생각을 짚어 볼수록 확신이 든다. 얼마 전 일이다. 치료를 받던 20대 중반 여성 환자로부터 치아가 이동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초진 모델을 보여 주고 켈리퍼스로 재서 발치와로 치아가 4㎜ 정도 이동된 것을 보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못 믿겠다고 우기는 일이 있었다. 결국 마음이 급하다 보니 눈으로 본 것도 믿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필자가 “그럼 어떤 식으로 설명하여야 하느냐”고 묻자, 환자는 그제야 수긍을 하였다. 그리고는 이야기 끝에 “내가 내 돈 내고 치료받는 건데 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결국 돈 받으려면 그 정도는 참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그동안 당할 만큼 당해서 잘 견딘다고 생각 했었는데 순간적으로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로 가슴 한 구석에 풀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치과의사들이 커다란 잘못이나 한 듯이 방송을 하고 난리가 아니다. 무슨 공공의 적이나 되는 듯, 무슨 큰 잘못이나 한 듯 그런 뉘앙스이다. 치과의사의 위
얼마 전 지상파 TV뉴스에 치과의사의 내용이 다뤄졌다. 임플란트를 불법으로 중국에 밀수출 시키는 데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또 치과의사협회가 무슨 큰 죄를 지은 듯한 내용으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최고의 벌금을 내렸다는 내용의 뉴스가 방송되었다. 그리고 주변의 치과의사가 아닌 지인들로부터 내용의 진위를 묻는 전화나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세상의 눈과 우리 치과의사의사들의 눈높이가 얼마나 다른지 실감이 난다. 그리고 답답함에 치가 떨린다. 눈앞에 사기꾼이 있는데 뭐라고 이야기해도 남들이 믿어주지 않을 때의 그런 답답함, 그리고 내가 사용한 말투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듯한 그런 답답함이다. 이 사회는 오래 전부터 이런 답답함을 해결하지 않아서 결국 모든 이들을 방관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담배 피는 중고등학생을 보아도 외면하고,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보아도 외면하는 것이 세상을 잘 사는 처세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즉, 사건의 본질을 따지지 않고 그 각각의 논리를 따르는 문제 때문이었다. 중고등학생을 훈계하다가 시비가 붙어서 한대 쥐어박으면 폭행죄에 해당되어 피의자 신분으로 합의를 보아야 하는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상황, 길거리에 쓰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