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시간을 내어 얼마 전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아 더욱 유명해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감독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 희망을 이룰듯하다. 영화는 아주 심플한 상하구성을 지녔다. 등장하는 세 가족의 사회적 신분과 부에 따라 ‘높이’라는 시각적 효과로 전환해 표현하였다. 지상에 사는 극상층의 IT회사 사장 가족, 지상과 지하의 중간인 반지하에 사는 하층인 주인공 가족, 사회에 나올 수도 없어서 완전 지하실에 사는 최하층 집사 부부가 있다. ‘높이’가 어떤 사건에 의해 만나는 접점이 생기고 겹치게 될 때를 수평으로 표현하며, 수평거리의 친밀도와 분노 등을 소품의 크기와 무게로 표현해 수석이나 일기장, 인디언 소품 등으로 표현했다. 심리와 감정의 적정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소품이라는 물품을 통해 시각화했다. 즉 수직은 높이의 시각효과로, 수평은 크기와 무게로 감정을 표현했다. 소품이라는 물질로 감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높이’로 비탈길, 반지하 혹은 계단을 사용했다. 수평도구로 접점과 감정의 크기에 따라 무거운 수석 혹은 가벼운 일기장을 사용했다. 아들이 사장 집을 처음 방문할 때 높은 비탈길을 오르고 가족이 사장 집을 탈출할 때 계단을 지겹도록 내려오는 이유이다.
영화는 우연한 기회에 가난한 집 아들이 사장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가족 모두가 신분을 위장하고 위장 취업을 하며 시작된다. 사장 집에 모든 것을 의존하며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기생충과 같은 삶을 산다. 하지만 그들이 그 집에 들어가기 위해 몰아낸 예전 집사가 다시 찾아오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하층과 최하층 두 가족이 먼저 접점이 생기며 겹쳐지고 수직구도에서 수평구도로 감정의 거리감이 나타났다. 사장이 이사를 오기 예전부터 살고 있었던 집사 부부와 주인공의 만남은 서로 다르다. 주인공에게는 수평적 갈등으로 감정을 떠난 생존을 위한 영역싸움이지만, 지하에 사는 집사 부부에게는 수직적 갈등으로 생존을 포함한 감정싸움이었다. 사장 부부는 주인공과 접점이 없는 수직적 거리가 유지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선을 넘지 않아”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하지만 사장 아들 생일잔칫날에 주인공에게 접점이 생기고 수평거리인 감정의 폭이 좁아지면서 모멸에 대한 분노가 표출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심리적으로 생각해볼 포인트는 칼에 찔려 죽어가는 딸을 지혈시키고 있던 장면에서 주인공의 결정이다. 세 가지의 선택이 그에게 주어졌다. 칼에 찔린 딸의 상처를 눌러서 지혈을 시키는 것, 딸을 시해한 범인과 싸움 중에 다친 아내를 도우러 가는 것,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냄새난다고 모멸감을 표출하는 이기적인 사장에 대해 분노로 응징하는 것이었다. 감독이 세 가지 감정을 동등한 갈등으로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모멸감에 대한 분노가 너무 커서 딸과 아내를 구해야 한다는 감정이 접근도 못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표현했다. 그 장면이 인디언 모자를 쓴 송강호 얼굴 영화포스터다. 주인공은 사장에게 분노를 폭발시키고 자신은 반지하에서 완전 지하의 삶으로 들어갔다. 분노 표출에 대한 대가를 역시 수직적인 시각으로 표현하여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고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감정을 대변해주었다.
심리학적으로 사회적인 분노보다 가족 구조가 우선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영화처럼 분노를 선택하지 못한다. 하지만 감독은 가족을 포기하고 분노를 선택하며 관객의 심리에 엇박자 갈등을 유발시켰다. 살아가면서 매순간 경험하는 갑질(시어머니, 상사, 고객, 조직 등등)에 대해 분노하지 못하는 모두를 대변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이 뭔가 생각이 정리되기 어렵고 감정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겠지만 무거울 것이다. 감정을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고 사물 시각화로 표현했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고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잘 만든 영화지만 너무 리얼해 마음 아픈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