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주식시장 변동성이 큰 시기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아침에 스마트폰을 열고 웃다가 오후에 후회를 한다. ‘영끌’로 레버리지에 투자한 사람이라면 주가의 작은 움직임조차 인생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정선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는 사람의 심리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물론 주식과 도박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투자하는 사람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 도박꾼 마음으로 변해버릴 수 있다는 경계가 모호한 점에서 심리학은 중요한 경고를 준다. 심리학에 ‘변동적 보상(Variable Reward)’이 있다. 보상이 일정하지 않고 언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을수록 사람은 더욱 강하게 그 행동에 몰입하게 된다. 슬롯머신이 사람을 중독시키는 이유다. 대부분은 돈을 잃지만, 가끔 찾아오는 큰 당첨이 뇌 속 도파민을 폭발적으로 분비시키면서 다시 레버를 당기게 만든다. 주식시장도 이러한 심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어느 날은 하루 만에 수십 퍼센트가 오르고, 또 어느 날은 이유조차 알기 어려운 하락이 찾아온다. 한 번 큰 수익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실력으로 얻은 결과라고 믿기 쉽다. 심리학적 용어로 ‘과잉확신
한 유명한 코미디언이 미국 비자가 발급되지 않아 월드컵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기사를 봤다. 이는 지난해 미국에서 일어난 한국인 기술자들 추방의 연장선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이와 유사한 일들은 있어왔다. 1492년, 스페인에서 알람브라 칙령(유대인 추방령)이 있었다.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며 국토회복운동을 완성한 스페인 왕정은 가톨릭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원했다. 왕정은 바로 스페인 영토 내의 모든 유대인에게 4개월 안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당시 왕정의 눈에 유대인은 가톨릭 제국의 순수성을 해치는 불순물이자, 쫓아내도 그만인 외지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제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스페인의 금융, 상업, 의학, 행정 등 경제와 지식의 중추를 지탱하던 핵심 인재들이었다. 이들이 전 재산을 헐값에 매각하고 네덜란드, 영국 런던, 오스만 제국 등으로 쫓겨났다. 그 후 스페인의 경제적 혈맥은 순식간에 끊어졌다. 금융·상업 인프라를 상실한 스페인은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재정 파탄을 겪으며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 이들을 포용한 네덜란드와 영국은 전 세계 금융과 상업 중심지로 우뚝 섰다. 유사한 사건은 기원전 237년에도
최근 주식 시장이 9,000선을 넘나들며 전례 없는 호황과 극심한 변동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매일 밤낮으로 화면 속 빨간색과 파란색 그래프가 춤을 출 때,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요동친다. 이런 거대한 돈의 흐름은 개인의 일상을 흔들어 놓기 충분하다. 하루에 수 백만원이 오르고 내리면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주식 그래프와 수익만 수시로 체크하게 된다. 심지어 빚투가 극심한 지경에 이르러 주식이 투자라기보다는 투기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렀다. 원래 주식은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업의 위험 분산과 자본의 대중화로 시작되었다. 주식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금융 공학의 정교한 계산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500여 년 전 유럽 한 나라에서 벌어진 정치적 사건의 나비효과에서 비롯되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알람브라 칙령(유대인 추방령)이 있었다.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며 국토회복운동을 완성한 스페인 왕정은 가톨릭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원했다. 왕정은 바로 스페인 영토 내의 모든 유대인에게 4개월 안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왕정의 눈에 유대인은 가톨릭 제국의 순수성을 해치는 불순물이자, 쫓아내도 그만인 외
5년 전 2021년 7월 2일, 유엔(UN) 총회 산하 상설 기구인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한국 지위를 개발도상국그룹에서 선진국그룹으로 격상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그 후 반도체, 군수, 선박 등 첨단 산업은 물론이고 K-뷰티, K-팝, K-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눈부시게 발전했다. 심지어 라면, 김밥, 김과 같은 지극히 서민적인 먹거리 문화까지 수출이 호황이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의 위상이 지구촌에 널리 알려진 시대다. 그런데 이런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분야가 있다. 교육이다. 문맹률이 최저이고, 교육 열기가 최고인 나라에서 교육현장은 붕괴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참교육’이 세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무너진 교권을 회복하기 위해 전권을 위임받은 감독관이 등장하여 학교폭력 가해자와 악성 학부모들을 거침없이 단죄하는 내용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주지만, 역설적으로 이 드라마 인기는 지금 우리 학교 현장이 얼마나 깊게 병들어 있는지를 반증한다. 게다가 정작 학교 현장에서 들려오는 실제 이
한국사를 보다 보면, 역사에서 금해야 하는 ‘만약’이란 단어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최근 흥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처럼 세조가 쿠데타를 하지 않고 단종이 지속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급격한 왕권 약화로 또 한 번 역성혁명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새 왕조는 개화기 때 일본 메이지 유신처럼 개방하여 일제 강점기가 없었을까. 인조반정 후에 논공행상에서 이괄에게 일등공신을 부여하였다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없었을 것인가. 인조반정의 군사 총지휘자였던 이괄이 이등공신이 되면서 불만이 생겼고, 이괄은 국경 군사로 반란을 하여 국방 수비가 허물어졌다. 패한 반란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치고, 그들이 인조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청의 앞잡이가 되어 침략을 충동하며 정묘호란이 발생하였다. 만약 이괄에게 일등공신을 주었다면 정묘호란은 없었을 것인가. 역사의 한 시점에서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드라마는 그 시점을 잘 잡는다. <재벌집 막내아들>이란 드라마는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이 분당 땅 투기, IMF 등 미래 예측 등으로 돈을 버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처럼 개인에게도 ‘만약에’란 단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10년 전이라면
2015년부터 22년간 서울 한 병원에 자해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가 4,452명이었다. 그중 24세 이하가 1,445명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1983년 겨울방학이 끝나가던 어느 날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전 국민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규 방송이 중단되고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라는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북한 이웅평 소령이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귀순했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서울 시내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강북에서 강남으로 가기 위해 한강 다리로 몰려든 차량과 인파로 인해 서울 교통은 마비되었고, 그날 한강을 건너 강남으로 넘어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전화통화도 모두 불통이었다. 서울시민은 처음 고립을 경험했다. 이 극적인 사건은 정치·군사적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나비효과가 지금도 강남에 이어지고 있다. 그날 이후 강북의 부자들이 강남으로 이사 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진짜 부자들은 모두 강북에 살았다. 권력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종로, 성북동, 한남동 등이 그들의 터전이었다. 당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던 강남은 그저 흙먼지 날리는 거대한 공
최근 스타벅스 사건이 사회적인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는 방향이 비상식적이다. 마치 좌우 진영의 이념적인 이슈인 것처럼 진행되고 있다. 이 사건의 문제점은 사회 구성원의 역사의식에 있고, 역사의식의 문제는 존립에 문제를 준다. 역사인식은 개인적인 다양성으로 접근할 수 없다. 공동체가 존립하기 위한 최소 단위가 역사인식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다양성이라는 이유로 이순신 장군을 비하하거나, 일제 강제 통치를 지지하는 생각을 지닌 자라면 이 땅에서 떠나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사회와 격리되어 비전향 장기수처럼 옥중투쟁을 하면 된다. 한 국가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세계가 주목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세대의 피와 땀 그리고 보이지 않는 희생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위상은 우연이나 자연 발생적인 결과가 아니다. 참혹한 전쟁을 겪고 전후 폐허에서 배고픔을 온몸으로 버텨낸 조부모 세대의 희생이 후진국을 건너는 기초를 깔았다. 그 위에 개인의 안락함을 기꺼이 포기하며 낮과 밤 없이 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베이비부머 세대의 인내가 개발도상국을 넘는 기적을 만들었다. 이 두 세대는 결
한자에 遊(놀 유)와 悠(멀 유)가 있다. 유람(遊覽)과 유희(遊戱)에서는 ‘유(遊)’를 사용하고, 유유자적(悠悠自適)과 유구하다(悠久)에서는 ‘유(悠)’를 사용한다. 이 두 글자의 공통점은 즐거움에 있다. 유(遊)는 몸을 움직이면서 얻는 즐거움이고, 유(悠)는 마음의 작용이다. 쉽게 요약하자면 遊는 ‘공간적인 움직임과 즐거움’이고, 悠는 ‘시간·공간적인 아득함과 마음의 여유’를 뜻한다. 고전 장자는 소요유(逍遙遊) 편으로 시작된다. 소요(逍遙)란 노닐며 걷는다는 의미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장자는 소요(逍遙)하면 진정한 유(遊)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몸이 자유로워야 완벽한 자유가 된다. 몸이 완전한 자유의 유(遊)를 얻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마음이 걸리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을 갔는데 부모님이나 가족 중에 누군가 아프다면 결코 몸이 자유로운 여행이 아닌 것이다. 유(遊)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한마디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자유다. 마음이 편해야 몸도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유(遊)와 유(悠)는 상호 필요조건이다. 마음이 편해야 몸이 편하고, 몸도 자유로워야 마음도 편해진다. 장자가 말한 유(遊)는 마음의 유(悠)를
요즘 초등학교에는 소풍이 없다. 1996년 교육개혁 때 소풍(逍風)을 학습의 연장선에 두어 현장체험학습이란 말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참 무지한 행위였다. 소풍(逍風)을 그저 놀고 구경이나 하는 놀이라 생각한 한심한 결정이었다. 소풍(逍風)에서 ‘소逍’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유래하여 세속에 걸리지 않은 자유를 의미하며, ‘풍風’은 신라시대 화랑도의 원류인 풍류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처음 학교에 소풍을 도입한 교육자들은 이런 것을 모두 감안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 위정자들이 단순한 생각에 소풍이란 단어를 현장체험학습이란 용어로 행정화시켰다. 용어는 내용을 바꾸는 힘이 있다. 소풍이 현장체험학습으로 바뀐 순간 즐거운 소풍은 일이 되고 짐이 되었다. 급기야 지금은 소풍이 사라졌다. 가장 큰 이유는 무능한 법원이다. 교육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2022년 강원도 속초에서 현장체험학습을 간 초등학생이 후진하는 차에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이 재판에서 담임교사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참 무능한 판결이다. 법원이 교육을 학살한 사건이다. 법적 잣대로 이대목동병원 소아전문의를 구속시킨 사건과 유사하다. 결국 소아전문의
광주에서 길을 가던 여고생이 일면식도 없는 20대 남자에게 무동기(묻지마) 살인을 당했다. 잡힌 범인은 사는 게 재미없어서 자살을 하려다가 범행을 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황당하고 참담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는 2023년 분당 서현역 백화점에서 발생한 흉기 난동사건과도 유사하다. 심리학적으로 반사회적 성격장애 혹은 정신의학적으로 조현병일 가능성이 의심된다. 이것은 전문가가 심도 있게 판단할 것이다. 만약 “어떤 음성이 범행을 지시했다”는 환청이나 “누군가 나를 해치려 한다”는 망상 등에 의해 범행했다면 조현병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범인 진술대로 사는 게 재미없어서 자살하려다가 범행을 하게 되었다면 반사회적 성격장애일 가능성이 높다.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감정 해소 도구로 사용한 행태로 전형적인 특징이다. 죄책감 결여 등으로 사회적 규범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희박하며,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입힐 고통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충동성과 자극 추구 경향이 강하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진술은 극심한 허무주의 뒤에 숨겨진 자극 추구 성향을 드러낸다. 일상의 무료함을 타파하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을 선택하는 것으로 정서적 조절 능력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얼마 전 한 초등학교에서 고학년 아이들의 싸움이 있었다. 교사가 아이들을 화해시키고 서로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한 아이가 이를 거부하고 교사를 폭행했다. 교사는 교권보호위원회를 신청했고, 부모는 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고소했다. 이 사건은 얼핏 보면 단순히 아이의 성격이나 부모의 성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는 개인적인 성향을 넘어 부모가 아이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해 감정을 이입시킨 것으로, 간섭이 아닌 지배의 형태로 생긴 문제로 보인다. 근래 부모가 자살을 선택하기 전에 아이들을 먼저 죽이는 일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런 행동은 심리학적으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부모가 분리되지 못한 자아로 인해 아이의 수치를 자신의 수치로 생각하면서 발생한 문제다. 심리학자 하인즈 코헛은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심리적 구조의 일부로 생각하는 현상을 ‘자기대상(Self-object)’이라고 정의했다. 정상적인 발달 과정에서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 돼야 하지만, 부모가 도리어 아이를 자신의 거울로 삼는 경우다. 교사가 아이에게 사과를 요구했을 때, 부모가 아동학대로 고소한 심리의 밑바닥에는 강렬한 수치심이 자리 잡고 있다. 부모는 아이 잘못을 아이의 독립된 행위로 보
이스라엘 병사가 레바논의 예수상을 파괴하는 사진은 25년 전 아프카니스탄에서 바미안 석불이 파괴되던 일을 떠올리며 충격과 더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종교적 성인인 부처나 예수님 상에 저 정도 짓을 한다면 포로나 피점령지 사람들에게 행할 짓은 미뤄 짐작이 된다. 종교적 상징물을 파괴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선민사상이다. 내가 믿는 신이 최고니 나머지는 모두 우상이고 미신이라서 무슨 짓을 해도 본인이 믿는 신을 위한 잘한 짓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령신앙이 없는 것이다. 정령신앙은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는 신앙이다. 이는 고등종교가 발달하기 전에 원시 종교형태였으며 아직도 우리나라는 민속종교 형태로 남아있다. 예를 들면 만약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불상이나 예수상을 실수라도 파괴하거나 손상을 입히면 그날부터 꿈자리가 사납고 잠을 설치게 된다. 천벌을 두려워하는 것도 정령신앙의 일종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종교가 들어오고 정착과정에서 종교적 박해는 심하게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종교 간에 유혈사태는 없었다. 그 근간이 정령신앙이다. 상대 종교의 신이나 상징물에도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해하려 하지 못한다. 한반도에 살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천하에 세 가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으니, 첫째는 하늘이요, 둘째는 스승이요, 셋째는 부모라 하였다. 하늘·부모·스승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학문의 시작이라 하였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공포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뜻이 아니다. 두려워할 만큼 소중하고 존귀한 영향을 지닌 존재란 뜻으로 경외심의 표현이었다. 최근 교육 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야기다. 계룡시에서 고3 학생에게 교사가 흉기로 찔린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학생의 정신적인 문제는 검토되지 않아 교권문제인지 학생 정신문제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경기도 광주 중학교에서 여교사가 체육 수업 도중 남학생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응급실로 간 사건을 보면 현재 우리 교육 현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던 전통적 교육관은 소멸됐다. 스승의 권위는 사라지고 직업만 남았다. 교사가 존경은 고사하고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사회가 됐다. 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통계에 따르면 교원에 대한 상해·폭행 건수는 2020년 113건에서 2025년 504건으로 늘었다. 수업일 기준 하루 4명의 교사가 폭행에 노출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에서
최근 카페 알바생이 커피 3잔을 마셨다는 이유로 고소된 사건이 주목을 받았다. 논란이 확산되자 고소는 취하됐다. 얼마 전 경비업체 직원이 초코파이 한 개를 먹었다는 이유로 고소된 사건이 무죄가 된 시점이라 더 주목되었다. 사건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 추악하다. 시험을 끝낸 고3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커피 3잔을 마신 것을 CCTV롤 확인한 점주는 알바생을 업무상 횡령으로 고소했다. 거기에 “대학을 갈 학생이 전과자가 되면 대학도 못가고 인생 망한다”고 협박하며 550만원을 합의금으로 받았다는 사실이 전해지며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경비업체 직원은 업체 직원들이 먹어도 된다고 해 통상적으로 먹던 것을 갑자기 절도로 내몰렸다. 1심 유죄는 항소심에서 무죄가 되었다. 1심에 유죄를 판결한 재판부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법이 사람 위에 있는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과연 일하는 알바생이 날짜가 지나서 폐기 처분될 커피콩으로 3잔을 마신 것을 횡령으로 고소를 하고, 심지어 이를 미끼로 550만원을 뜯어낼 일인가. 외부에서 서비스 직원이 오면 음료수나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그동안 우리 사회의 일반적 상식이었다. 그런데 평소에 먹으라고 해놓고
지구촌이 시끄럽다. 온통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정상적인 것이 없다. 환율은 1,500원을 넘었고, 주식도 급등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름값은 한없이 올라가고 가격이 가장 저렴한 주유소에는 차량 행렬이 줄을 서고 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시대다. 이럴 때일수록 그냥 가장 평범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것이 생활이나 정신 건강에 좋다. 이런 여파는 치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장 3,500원이던 위생 글러브 가격이 5,500원으로 올랐다. 환율이 오르면 수입 재료비는 당연히 오른다. 코로나 때는 9,000원까지 오르기도 했다. 개원가에 재료비 부담이 점점 커지지만 그렇다고 진료비를 올리는 것은 가격저항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환자도 심리적으로 예민해지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안이 커지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지출을 줄인다. 심리학에서 이를 ‘위협 반응(threat response)’이라 한다. 경제적 불안처럼 위협적인 상황이 오면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전전두엽 기능은 상대적으로 억제되면서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원시적 본능이